2026년 2월, 치앙마이 여행
2026년 2월 17일 화요일
치앙마이 도착이 지난 토요일 밤이니 오늘로써 네 번째 밤이다. 조식을 먹으면서 빨래를 언제쯤 맡길까 날짜를 가늠하고, 낮잠 자고 일어나 늦은 외출을 했다. 딱히 특별한 게 없는 하루를 보내고 언제나처럼 내일은 밀린 무언가를 해야지 다짐하며 잠자리에 들지만 성공하지 않을 것을 안다. (이렇게 일기를 쓰고 있다는 게 아주 놀라울 따름일 정도로) 게으르다. 혼자 여행하면 더더욱.
혼자 여행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렇다고 함께하는 여행을 싫어하느냐 묻는다면 그렇지도 않다. 나에겐 꽤 오랜 여행 파트너들이 존재한다. 시간을 들여서 여행의 합을 맞춰온 짝꿍, 가족, 친구. 함께하는 여행도 그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다. 문득 혼자 여행하기 시작한 게 언제쯤이었는지 궁금해졌다. 아마도 대학생 내일로 기차여행을 끊고 전국 모든 기차 노선을 다 타보리라 야망에 가득 찼던 스무 살 중반이었던 것 같다. 기억이 많이 휘발됐지만 태백 너머까지 올라갔던 기차가 거꾸로 내려왔던 풍경과 영주역 객차 숙소에서 잠들고 새벽 기차소리에 깼던 기억(이제 보니 나는 이때도 침대 기차를 좋아했구나?), 지금은 없어진 간이역 풍경들이 오래된 앨범처럼 떠오른다.
해외의 경우에는 서른 살 초반이었던 것 같다. 여름휴가로 같이 다낭 여행을 계획했던 친구가 급작스런 사정으로 뜻하지 않게 일정을 취소했다. 국내는 괜찮아도 해외는 어렵지 않을까 걱정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일주일 내내 식당도 잘 가고, 마사지도 잘 받고, 쇼핑도 잘하고, 산책도 잘 가는 스스로가 마치 프로 여행러 같았달까. (프로라고 하기엔 공항을 나오자마자 택시 기사에게 돈을 뜯기긴 했다)
혼자 있는 시간이 좋기도 하지만 물론 외로울 때도 있다. 함께 나누고 싶은 좋은 풍경을 순간순간 마주할 때마다 혼자라는 자각이 강하게 밀려든다. 그렇다면 나는 굳이 왜 혼자 여행을 하는 걸까. 특별할 것 없는 시간을 보낸다면서 굳이 멀리 여행을 할 필요가 있을까? 외로운 시간을 견디면서까지 돈을 쓰고 떠날 필요가 있을까? (돈은 안 모으고 여행만 떠나는 딸이 못마땅한 엄마의 단골 질문) 아직 엄마에게 치앙마이에 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며칠 내로 자수를 해야 하며, 그렇다면 어차피 받을 질문(이자 잔소리)이니 대비해 보도록 한다.
우선, 혼자 여행이 필수 여행은 아니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른 것처럼 여행의 스타일도 제각각일 것이다. 혼자 여행을 떠나보지 않았다고 그 사람의 경험치가 낮은 것은 절대 아니다. 돌아보면 내가 혼자 떠났던 이유는 대체로 업무거나, 의도치 않게 계획이 틀어지거나, 일상이 힘들어서 다 던져버리고 싶거나. 어쩌면 혼자만의 여행을 좋아한다기보다 썩 어려워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지도 모르겠다.
오늘 스케줄을 낱낱이 상기해 보자면, 낮잠 자고 일어나 느지막이 시작한 일정은 우선 걷기. 목적 없이 걸으면서 잠들어있던 님만의 지리 감각을 깨우고, 없어지거나 달라져버린 가게들을 훑어보고, 설 명절 인파로 가득 찬 마야몰 광장의 사자춤을 잠시 구경했다가, 좋아하는 식당에 들어가 욕심부려 세 가지 메뉴와 창 맥주를 시켜 먹고, 원님만을 돌다가 좋아하는 향수를 하나 사고, 이제는 사라진 빈티지마켓 터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흡연이 가능한 카페에서 커피를 한잔 마시고, 여전히 그대로 있어서 반가왔던 과일 리어카 사장님에게 망고를 사서 돌아왔다. 일상이라고 해도 다름 아닌 일정들.
그렇지만 일상에서의 물리적인 거리감은 나를, 그리고 나를 포함한 상황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해치우기 바쁜 일상에서 뚝 떨어져 나와 아무도 나를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가만히 앉아있다 보면 퀴퀴하게 묵혀놨거나 외면했던 것들을 비로소 생각해 낸다. 별 거 없는 일정들 사이로 끊임없이 떠오르는 생각들을 즐겁게 또는 괴롭게 혹은 부끄럽게 마주한다. 현실에서 도망친 것 같지만 결국 오롯이 현실을 직시하기 위해 떠나는 게 아닐까. 그냥 대충 살고 싶다가도 제대로 살고 싶은 마음 같기도 하고. 정답은 모르지만 해답을 찾아가고 싶은 것 같기도 하고. (별생각 없이 편하게 돈 쓰면서 쉬고 싶은 것 같기도 하고)
엄마한테 이렇게 말했다간 지랄하고 자빠졌네 욕먹을 게 빤하니까 다시 그럴싸한 핑계를 찾아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