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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인메이커 Jun 21. 2016

제주 바람

바람은 제주의 어디에서도 느낄 수 있었고 언제든 불어왔다. 처음에는 이 바람을 피해보려 그늘 속으로 숨거나 커다란 나무의 옆으로 걷거나, 방파제 아래에 몸을 웅크리기도 했다. 그럴때마다 나는 빈 공간의 끄트머리까지 가득 채워진 바람의 노크에 여지없이 발각되었다. 어쩌면 검은 화산재와 현무암보다 훨씬 전부터 이 곳을 지켰을 오래된 자연앞에 나는 한심하게 저항했다.



풍화라는 말이 떠올랐다. 처음 만난 새로운 시선을 향해 존재를 뽐내며 치기로 달려들었지만, 지도에서 본 것보다 훨씬 더 넓은 제주도의 영토를 실감하였고 그 안에 아주 미세한 내가 있었다. 처음 날것의 생각들은 육중한 바람의 불가항력 앞에 깎이고, 다듬어지면서 제자리를 찾아갔다. 수백년의 삶의 반복을 통해 제주 사람들은 바람 앞에 겸손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을 오롯이 보전하는 법도 알고 있었다. 강풍에 견디고자 마을 곳곳에 쌓은 높은 돌담과 낮은 지붕. 사선으로 자생하는 마라도의 들풀과 서로를 질긴 밧줄로 이은 모슬포 항의 어선들. 그것은 거대한 자연앞에서 나의 한계를 인정하되, 결코 종속되거나 굴복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겸손함의 실천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는 모서리가 깎이고, 더욱 미세해지고, 비겁해질 것이다. 점점 거세지는 바람 속에서 내 안에 촘촘한 돌담 하나 세우는 일. 나날이 엄혹해져가는 세상살이에서 한 걸음 내딛을 수 있다는 말보다 더 소중하고 절실한 것은 지지 않는다는 말일테다. 그러니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겸손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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