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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인메이커 May 01. 2016

책으로 돌아가기

지식인의 서재에서 발견한 맛있는 음식


나의 하루는 일상생활에서의 활력을 불어넣는 정신적 충만함, 이상理想을 추구하기 위한 다짐의 N극과 실천의 결여에서 오는 무기력함의 S극이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우리의 인생이 자석이라면 이렇게 양극이 번갈아가면서 제 역할을 해야 비로소 그 의미로서 존재할 수 있기에 자연스럽다. 다만, 둘의 생성 주기에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이를테면 매일 자기전에 다이어리에 하루를 반성하고 느낀 감정을 기록한다거나, 독서모임을 준비하기 위해 주어진 책을 가뿐히 소화해내고 오늘 업무전화를 해야하는 사람들에게 빠짐없이 연락을 하는 등의 일상의 반복적 행위를 지켜나가는 다짐과 그 실체적 행동 사이에는 항상 채워야 하는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장들을 단순히 나열하고 들여다보는 것과 그 시선 속에서 실존하는 것과의 엄청난 간극을 경험하고 그 벌어진 공간속에서 느끼는 자기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매일 절치부심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형식과 틀을 간과한 흰 바탕의 화면에서 이러한 소회를 고백하는 것 또한 자기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처방이리라.


일주일중에서 이 두 자력磁力이 가장 활발히 활동하는 시기는 바로 일요일에서 월요일로 넘어가는 때이다. 다짐의 N극과 무기력의 S극이 서로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월요일 새벽 침대 어귀에서 치열한 힘겨루기를 한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그 소규모 전투ㅡ이 지리한 다툼이 꾸준히 몇 개월동안 이어지니 이제는 마음속에서 고착화 되기에 이르렀다ㅡ에서 패배한 무리가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금 진군한다. 오늘 저녁에 함께한 전투는 그동안 밀려있던 책을 읽어보자는 '다짐'과 실천이었다. 한 달에 3번. 크고 작은 독서모임에 참여하지만 그 목적이 큰 깨달음이나 통찰력을 얻는 것이 아닌, 단순히 구성원으로서의 영향력을 재확인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점점 책장을 잠식해가는 낯선 책들. 책의 제목과 그 두께가 가진 착시에 혼절하여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한 책이 그 중에 절반이요, 작가의 메시지가 아닌 일상의 메시지에 휩쓸려 끝까지 소화하지 못하고 떨떠름하게 이별한 책이 그 중에 절반이었다. 이러한 독서행태가 만연한 상황임에도, 나의 얄팍한 지적허영심이 배설하는 타인으로부터의 평판과 인정은 너무나 기름지고 달콤하여 더 이상 그 책과 재결합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가진단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나도 모르는 새 지적 '소화불량'에 걸리게 된 것이다. 끔찍했다. 정리하지 못한 책과 블로그의 포스팅을 방치해둔 채 아무 문제없다고, 잘 하고 있다고 외치는 내면의 목소리가 서서히 나를 결박하고 있었다.


게으른 사람이 갈증이 심화되면 스스로 물을 찾아 나서기 시작하는 것처럼, 나는 그만 벌떡 일어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서 응급처치를 시작했다. 퇴근하는 지하철 안에서 다음번 독서모임 선정 도서인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을 알라딘 중고서적으로 구매하고 책에 대한 정보를 천천히 읽어 내렸다. 하단부에 그 책을 추천한 작가 (폭 넓게는 지식인)의 목록이 있었는데, 그 중 소설가 조정래의 이름이 보였다. 링크를 타고 들어간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에서 조정래 선생님께서는 자신의 서재를 소개하고 독서에 대한 철학관과 그 분께서 추천하는 책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그 중 한 권이 동물농장이었고, '소화불량'에 걸린 익숙한 책 몇 권도 눈에 들어왔다.





1. 소설가 조정래의 서재 바로가기 (네이버 링크)


"사회적 고민을 가진 책이라는 것은 한 사람의, 짧게는 10년, 길게는 평생의 영혼의 작업이 응축, 줄여서 모아진 액기스예요. 그런데 그것들이 수 없이 많이 나오는 것 중에 또 고르고 골라놓은 것들을 명저, 명작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내 영혼이 깨어있기를 바라고, 내가 사물을 새롭게 볼 수 있는 능력이 있기를 바란다면, 그리고 내가 사람으로서 품격을 지닌 지식적 교양인이고 싶어 한다면은, 책을 읽지 아니하고 어찌 하겠는가. 
그 다음, 밥 먹을 때, 고통스럽게 먹는가? 항상 즐거움으로 먹는다. 정신의 배고픔도 또한 느낄 줄 아는 자에게는 독서가 왜 필요하냐고 말하지 아니할 것이다. 배가 고파서 밥을 맛있게 먹듯이 영혼의 배고픔을 항상 느끼는 자는 책을 맛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선택을 못하는 자에게 책을 읽으라고 말하지 말라. 그 선택을 잘하는 자에게 왜 너는 책을 읽느냐고 묻지 말라.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아! 조정래 선생님의 인터뷰에서 본질에 가까운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우리가 배가 고플때 밥을 맛있게 먹듯, 영혼의 배고픔을 느낄 때 어찌 책을 맛있게 먹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굶주림에 게걸스럽게 밥을 먹어 치우는 사람에게 왜 밥을 먹느냐고 물어보는 것만큼 무의미한 질문이 없는 것처럼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책을 왜 읽느냐고 물어보는 것 또한 같은 이유일 것이다. (오히려 이유를 찾는 행위가 책의 본질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것일지도...) 하지만 나는 여기서 한 번 더 생각을 해야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영혼의 배고픔을 인지할 수 있는가? 그것은 작금의 내 현실처럼 N극과 S극이 번갈아가면서 자신을 괴롭히거나 그것이 지적 소화불량으로 진단되어 나타날 때이다. 하지만 이 고통조차 '영혼의 배고픔'이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책을 권하는 것은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음식을 대접하면서 깊은 맛을 느끼길 기대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 영혼의 배고픔을 깨닫게 하는 것은 인생의 우연한 순간을 필연적 결과로 해석할 줄 아는 힘이 아닐까. 이를테면 요즘들어 유난히 자기 부정이 빈번해지고, 무력감이 상승하고 자존감이 떨어지는 일상이 반복된다면 그것은 우연한 순간이 아니라 어떠한 부족했던 삶의 요소가 조금씩 누적되어 나타나는 필연적 결과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부족한 자신의 모습마저 '나의 일부분'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맛있는 책의 향연을 소화해낼 준비가 된 것이다.


지식인의 서재를 조금 더 둘러보았다. 여러 유명인사들의 인터뷰를 주마간산하듯 훑고 나의 시선이 마침내 도착한 곳은 광고인 박웅현의 서재였다. 가장 책의 내용이 세련되고 요즘말로 하면 '엣지있는' 문체로 많은 공감을 이끌어내는 멋진 분이다. 그리고 나에게서 몇 안 되는 지적 '소화불량'을 극복하게 한 <나는 도끼다>와 <여덟 단어>라는 훌륭한 처방전을 주신 분이기도 하다. 이 분의 이야기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확인 할 수 있다.



2. 광고인 박웅현의 서재 바로가기 (네이버 링크)


"인문이 왜 중요하냐? 우리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니까 중요한 거죠. 그래서 이게 더 제일 쉬운 예 같은데, 어느 라디오 방송에서 '인문학을 하면 밥이 나옵니까?'라는 짓궂은 질문을 뭐 4728님이 물으셨습니다. 하며 물었어요. 그래서 제가 했던 답이 뭐냐하면 "인문학을 해서 밥이 나오는 직업도 있고 그렇지 않은 직업도 있다. 근데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인문학을 하면 밥이 맛있어진다."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인문적인 촉수가 생긴 사람들은 똑같은 24시간을 더 풍요롭게 산다는 얘기거든요. 그게 '이 인문의 의미다'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박웅현의 서재 인터뷰 中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나는 온 몸이 촉수인 동물이 되고 싶다'라는 말을 했다. 양적인 충만함과 질적인 충만함을 구분해야 하듯, 풍성한것과 풍요로운 것은 분명 다르다. 매일 인스턴트 음식만 먹으며 생존을 위한 식사를 하는 사람과 신선한 식재료로 직접 요리한 음식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먹는 사람이 느끼는 만족감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는가. 미각에서 뿐만 아니라 시각, 청각, 후각 그리고 책을 읽고 사유하는 행위에서도 풍요로움을 가득 느낄 수 있도록 예민한 촉수(감각)를 갖고자 하는 그의 간절한 바람이 비단 당신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자, 이제 맛있는 음식을 먹을 준비가 되었다. 몇 개월째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고뇌와 영혼의 기아에서 허덕이는 나를 구제할 맛있는 책이 마련되었다. 이제 조지오웰을 시작으로 그 동안 만성적으로 괴롭힌 소화불량을 말끔히 치유하고자 한다. 월요일 저녁의 전투에서 승리한 오늘밤은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을 것 같다.


'고통은 그 의미를 발견하는 순간 더 이상 고통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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