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살아있다는 외침
젊음을 연소시켜 불안한 미래를 사는 우리들을 일부 어른들은 삼포세대, 혹은 달관세대라고 부른다. 우리는 그들이 짜놓은 프레임에 저항하기 위해, 혹은 개인의 성장을 위해 모두 바쁘게 살아간다. 아니, 바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조차 할 틈 없이 바쁘게 산다. 취업시장의 분위기는 이미 오래 전부터 단단히 얼어붙어 도대체 녹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기나긴 저성장의 터널 속에서 만난 우리의 의식 저변에는 조금만 방심하면 그대로 뒤쳐져 돌이킬 수 없다는 집단적 위화감이 만연해졌다. 그래서 도처에 무겁게 내려앉은 이 차가운 공기의 압력은 우리를 작고 네모난 공간으로 더 깊숙이 내몰고 있다. 이 사회에 만년설이 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의 현재 상황이 아닌 타인이 무엇을 (생각)하고 사는지 호기심을 가지는 것은 어쩌면 정서적 사치에 가까운 감정 소비행위일 것이다. 이렇게 강요 받은 개인의 이기심이 사회가 지향하는 항상성을 초과하게 될 때 이른바 '보편적 공감 결핍'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그렇다면 현재의 나는 이러한 현상에 과연 자유롭다 말할 수 있는가? 나는 만연해진 공감 결핍을 극복하고자 글쓰기의 최전선으로 담담히 뛰어들었다.
벌써 밤 열 두 시가 넘었다. 오늘도 자정이 되기 전에 잠들고 싶은 나의 바람은 긴 하루를 매듭짓지 못한 불안 앞에 소멸되었다. 불안함은 곧 자신감의 상실을 의미했다. 나는 팔굽혀펴기를 하고, 베란다 문을 열어 찬 공기를 쐬었다.어젯밤 마트에서 묶음으로 산, 냉장고의 맥주가 생각났지만 손을 대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다. 침대에서 나는 근질거렸다. 몇 시간 뒤면 밝아올 새 아침의 모습과, 그로 인해 점점 작아지는 새벽의 모습이 감은 눈 앞에서 상충하여 꽤 오랫동안 몸을 뒤척여야만 했다. (…)
날이 밝으면 기업 최종면접을 보기 위해 서울행 기차를 타야 하는 한 취업준비생의 마음. 혹은 중대사를 앞둔 평범한 한 인간의 감정을 들여다보기 위해 나는 수 많은 단어와 문장을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나는 이렇게 활자의 생성과 소멸을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나 자신, 혹은 타자의 영역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새로운 문장과 표현을 위한 고뇌와 사색이 깊어질수록 나는 결국 상대방에게 완벽히 닿을 수 없는 존재임을 알게 되었다. 하나의 글을 통해서 하나의 새로운 세상을 마주하며, 또한 그것이 결코 나와 같을 수 없으며, 그래서 다름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마음을 기르는 것이다. 글쓰기는 내가 아닌 모든 것에 대해 들여다보려는 치열한 시도이며 무한한 삶의 조각들을 발견하는 행위이다.
나는 글을 통해서 내가 아무리 크게 넘어지고 꺾여도 인간은 결국 갈등을 극복 해내고야 마는 존재임을 인식한다. 글 속에서 수 없이 좌절하고 절망하는 주인공(혹은 글쓴이)을 보면서 ‘그래도 내가 아직 완전히 바닥을 보진 않았구나’ 하고 스스로 일어서는 힘이 남아있음을 알게 된다. 수 많은 퇴고와 수정 속에서 마침내 단련된 공감의 실체와 새로운 삶의 시선을 경험하면 퍽 기분이 좋다. 정화. 그것이다. 인간의 삶에 깊이 ‘감응’하면서 나의 마음이 정화되는 일. 그것은 아직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특별한 신호이거나, 살아야 하는 사소한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