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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심 Feb 27. 2017

엄마의 의미

엄마에게 드리는 편지, 선물 3.


대학생 시절, 나는 대구의 한 보육원에 봉사활동을 다녔다.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보육원으로 들어설 때면, 안쓰러움과 걱정이 서로 뒤엉켜 내 가슴에 주렁주렁 한 가득 무겁게 매달려있는 것만 같았다. 이 곳 보육원에 봉사를 한 지 4년이 다 되고 봉사동아리의 회장직을 맡은 나였지만, 이곳은 나에게 올 때마다 새롭고 설레고 또 가슴 한 구석이 진하게 아려오는 아픈 곳이었다.

“어, 선생님 오셨다.”

한 아이가 나의 두 손을 잡고 빙그르르 돌았다. 그 아이의 붉은 온기가 나의 혈액을 타고 도는 것 같았다.

“잘 있었어?”

“네, 선생님. 일주일이 백일 같았어요. 아니 천년, 만년 같았어요.”

“그렇게 선생님이 보고 싶었어?”

“그럼요. 나는 선생님이 제일 좋고 매일 보고 싶어요.”

이 아이는 내가 처음으로 이 보육원에 왔을 때 담당했던 학생이었다.




4년 전 처음 그 학생을 만났을 때 그 학생은 나에게 좀처럼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다.

마치 마음의 문을 녹이 슨 자물쇠로 굳게 잠가 놓은 듯 그렇게 나에게 매몰차게 굴었다.

“안녕? 이름이 뭐야?”

“........”

그 아이는  대답 대신 팔짱을 끼고 눈을 아래, 위로 흘겼다.

내 나이 20살, 처음으로 봉사활동을 온 곳에서 이런 일을 당하니 머리가 아찔했다.

“언니가..... 아니 선생님이 뭐 잘못했니?”

“흥. 저리 가요. 가버리라고요.”

그 아이는 소리를 버럭 지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는 머리에 망치를 얻어맞은 듯 멍하게 1시간을 흘려보냈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도 나는 도대체 내가 뭘 잘 못했는지에 대해 곱씹고 또 곱씹어 보았지만 도대체 답이 나오질 않았다.




다음 봉사 활동을 가는 날 나는 덜컥 두려워졌다. 가슴에 먹구름이 꽉 찬 듯 답답했다.

‘또 나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 가버리면 어쩌지.’

두려움이 내 용기에 깊게 침투해 내 마음을 제 마음껏 주무르고 있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또 오기가 생겼다. 그 아이를 내가 한 번 변화시켜 보고 싶다는 오기.

그래서 나는 다시 심호흡을 하고 보육원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그 날 따라 버스 안이 유난히 좁고 공기가 탁한 것처럼 느껴졌다.

보육원에 오니 그 아이가 입술을 꽉 깨물고 기둥 뒤에 숨어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밝게 웃으며 그 아이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

하지만 그 아이는 또 눈을 한 번 흘기더니 도망가 버렸다.




원래 보육원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나 수학 등을 가르치는 게 목적이었지만, 나는 마음을 바꾸고 오로지 6개월 동안 꾸준히 그 아이에게 밝게 웃으며 인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6개월 내내 그 아이가 나에게 어떻게 대하든 간에 무조건 웃으며 밝게 인사를 했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나고 어느 날 매 번 내 얼굴만 봐도 바로 밖으로 나가던 그 아이가 갑자기 내 주위를 맴돌았다. 그 사실 하나 만으로도 너무 행복해서 내 몸에 소름이 알록달록 돋아났다. 나는 용기를 내어 그 아이에게 다가가 집에서 미리 준비 해 놓은 사탕을 불쑥 내밀었다. 그러자 그 아이가 웃었다. 앞니가 섞은 모습 그 마저도 귀엽고 앙증맞아 보였다. 그 아이가 웃으니 내 울퉁불퉁한 가시덤불 같았던 모양의 마음이 부드러운 솜이불 모양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내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이성 간에 두근거림 외에 처음으로 들어보는 요란한 심장 박동 소리였다. 그렇게 조금씩 발전하여 1년 후 우리는 서로 절대 떨어지지 않는 빛나는 자석 같은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처음에 왜 그렇게 나에게 냉정하게 굴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서는 서로가 약속이나 한 듯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먹구름이 재채기를 크게 했는지 세차게 바람이 불던 어느 날, 그 아이가 내 품에 안기며 먼저 말을 꺼냈다.

“선생님 처음 왔을 때요. 제가 못되게 굴어서 미안해요.”

“응. 괜찮아. 지금 좋은 걸.”

“근데 제가 왜 그랬는지 아세요?”

“글세, 내가 혹시 예뻐서 질투한 거니?”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멋쩍은 농담을 던져보았다. 그랬더니 그 아이가 갑자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당황했지만 말없이 그냥 그 아이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한참을 울던 아이가 말했다.




“저를 제일 사랑해주어야 할 우리 아빠한테도 버림받고 보육원에서 지내고 있잖아요. 제가. 그래서 마음의 문을 닫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보육원에 있을 때 저에게 처음으로 따뜻하게 다가와주신 선생님이 계셨어요. 저는 그 선생님이 마치 제 돌아가신 엄마 얼굴이랑 닮아 보여서 처음 봤을 때부터 너무 좋아서 따라다니고 안기고 엄마라고 부르고 그랬었거든요... 안 그래도 돌아가신 엄마가 보고 싶어서 매일 울고 있었던 시기인데 엄마랑 닮은 그 선생님이 이 보육원에 오신 거죠.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제 작은 손을 잡고 이런 말씀을 하셨거든요. 아가야, 먼저 가서 미안해 엄마가 보고 싶으면 엄마라고 마음껏 외치고 기도하렴. 그럼 엄마가 나타나서 꼭 안아줄게. 이런 말을 하시고 하늘로 가셔서 엄마를 닮은 그 선생님을 보니까 혹시 엄마가 보내주신 선물이 아닐까 생각이 들어서 그 선생님에 대한 마음이 더 애틋했었어요. 근데 두 달쯤 후부터 안 오시기 시작하더니 3개월이 지나니까 아예 안 오시더라고요. 매일매일 기도하면서 기다렸어요. 울고 또 울면서.. 제발 우리 엄마 닮은 선생님이 다시 와달라고 그렇게 빌었었거든요. 근데 끝까지 안 오시더라고요. 절 두고 하늘나라에 간 엄마처럼..... 저는 그때 하늘에 계신 엄마가 더 그리워져서 밥도 안 먹고 비쩍 말라서 아이들이 해골이라고 놀리고 그랬어요 그때 제가 상처를 더 많이 받아서 선생님에게도 마음의 문을 오랜 시간 못 연거예요.”   




 그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나니 그 아이 이 가 작게 내뿜는 들숨, 날숨조차 더 사랑스럽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잘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우리의 인연은 길게 갔다. 지금도 한 번씩 그 아이가 생각이 날 때면 내 마음에 애잔함이 동심원을 그리듯 서서히 퍼져온다. 이 세상에 사랑의 온기가 가득하기를 바라며 그 아이에게 이 글을 바친다.


이 글로 제가 한국언론인협회 회장상을 받았답니다.

언제나 옆에 있을 것 같은 우리 엄마는 그 누군가에게는 너무도 그립고 애절한 대상입니다. 어머니가 옆에 계실 때 최선을 다해 잘하는 것 그것이 효도가 아닐까요?      






엄마


                                                          작가 이미주  

   

엄마도 꽃다운 시절이 있었지

엄마도 이루고 싶은 것이 있는

꿈 많은 시절이 있었지

엄마도 열정적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시절이 있었지

엄마도 엄마를 살뜰히 챙겨주시는

엄마의 엄마가 계셨지

엄마도 주름 없이 외모에 신경 쓰시는

어여쁜 시절이 있었지     


하지만 지금은 오로지 나를 위해

                    엄마로만 사시는 나의 엄마                    

엄마는 모든 걸 포기하시고

자식의 짐을 짊어지고는

자식 안에서 꽃을 피우고

꿈을 키우고 사랑을 주고

자식을 예뻐하시며 살다가     

주름이 늘고 나이가 들고 약해지시다

세월이 흘러 늙어지면


자식 안에서 못 다 핀 꽃을 아쉬워하며

하늘에 올라가 찬란한 꽃을 피우실 테다     

그곳에서도 오로지

자식 걱정에 눈물을 흘리시면

그 눈물이 꽃비가 되어

       하늘에서 내릴 것이다          



엄마 이야기가 마무리되었습니다. 다음에 다른 주제로 뵙겠습니다^^

(사랑이야기를 할지 꿈 이야기를 할지 고민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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