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인생 제2막, 진로진학상담교사입니다.
진로진학상담교사는 '진로와 직업' 과목의 수업을 하고, 학교 진로교육 전반을 기획-총괄하며 학생은 물론 학부모, 동료 교사들의 진로진학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눈다. 수업을 하는 교과교사이면서 상담을 하는 상담교사, 교과 수업은 맡은 학생들만 대상으로 하면 되지만 진로진학상담은 학교 구성원 전체를 '잠재적 내담자'로 두고 준비해야 한다.
학교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진로진학상담을 진행할 때 학생들은 담임교사의 허락을 받고 신청하도록 하고 학부모는 담임교사를 거치지 않고 온라인 예약시스템으로 상담을 신청하도록 하고 있다. 학생들의 '학교에서의 보호자'는 담임이기에 담임이 모르는 상담, 담임과 협의되지 않은 상담과 진로지도는 하지 않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학생과의 상담 내용은 당연히 비밀로 지켜져야 하지만 학생과 협의하여 필요한 부분은 상담 후 담임교사와 공유하여 학생의 진로지도에 힘을 보태고 있다. 학부모의 경우 담임교사를 통해 상담을 신청하면 담임교사의 피로도가 얼마나 높아질까? 담임을 맡았던 경험을 떠올려보면, 담임교사가 오롯이 학급 학생들에 집중하고 맡은 교과 수업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었다. 더군다나 이제 23년 차 중견교사로서, 후배 교사들에게 도움을 주지는 못할 망정 불필요한 일거리를 주는 미련한 선배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상담 신청과 진행은 내 선에서 해결하되, 역시 상담 후 학부모와 협의하여 필요한 상담내용을 담임교사와 공유하여 학생 지도에 참고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우리 교육현장에서 '진로교육'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인 대처(진로전담교사의 선발과 배치, 진로교육법 시행, 자유학기제 시행 등)를 하기 시작한 지 14년 정도 되어간다. 제도나 교육과정, 진로와 진학, 취업에 대한 인식변화도 있었고 젊은이들의 미래 준비를 돕는 다양한 자원들이 마련되었다.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국가 차원'에서 주도한 변화이다 보니 '관심(진로교육에 대한 필요성 인식)'이 '현실(각종 제도와 자원 마련)'로 자리 잡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크게 보면 긍정적인 발전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공교육보다 사교육에서 더 이익을 취하고 있다는 등의 부정적인 평가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늘 그렇듯 공교육에서는 사교육의 투자 규모를 따라잡기 어렵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내가 어찌할 수 없으니...
23년 차 중견교사이자 진로교사, 고등학생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 교사의 재교육과정을 담당하는 강사, 상담자로서 내가 걱정하는 것 중 하나는 사교육의 물량공세가 아니다. 바로 '제대로 된 진로교육 프로세스에 대한 이해가 아직도 부족한 현장'이다. 학생들을 지도하는 교사, 학생들을 양육하는 학부모들 중 '진로'를 '진학'과 '취업'에만 국한하여 생각하거나 이전처럼 '평생직업', '입신양명'에 기준을 두고 있는 이들이 아직도 많다. 여기에 입시 준비에 대한 부담까지 더해져, 학생들은 '진로를 무조건 빨리 확정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고 있다. 물론 일찍 일어난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옛말이 틀리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요즘처럼 사회변화의 속도가 빠르고 다양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무조건 일찍 일어나는 것보다 원하는 벌레가 나타나는 시간과 장소에 때맞춰 도착하는 새가 더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환경에 따라 주식으로 삼을 벌레의 종류가 바꿀 수도 있는 새가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기도 할 것이다.
상담을 하다 보면 또래보다 일찍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준비하는 학생도 있고 신중하게 오랫동안 망설이면서 결정을 미루는 학생도 있다. 일찍 결정을 하더라도 금방 다른 분야에 흥미를 느껴 목표를 바꾸기도 하고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서 동시에 이것저것을 준비하는 경우도 있다. 학창 시절에 꾸는 꿈, 학교생활기록부에 적힌 장래희망(직업)은 여행의 여정에서 보게 되는 다양한 풍경과도 같다. 너무나 인상 깊어서 평생 동안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장면도 있겠지만 더 멋진 장소에 도착하여 이전의 여정은 까맣게 잊게 되기도 한다. 여정 내내 마음에 드는 풍경을 하나도 찾지 못하다가 여행지에 도착해서, 그것도 여행의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여기가 참 좋구나'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진로는 학생들의 기질과 관심, 현재 처한 상황과 육구에 따라 빨리 결정할 수도 있고 늦게 결정할 수도 있고 언제든 바뀌어도 문제가 없는데, 부모와 교사들은 학생들이 진로를 결정하지 못했다는 말에 '그러면 큰일 난다'라고 도리어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학생들은 자신이 부족해서, 자신이 늦되어서, 자신에게 문제가 있어서 진로를 속히 결정하지 못한다고 자책한다. 왜 꿈이 자주 바뀌냐는 핀잔에 한창 재미난 인생을 꿈꾸어야 할 십 대의 학생들이 '모르겠다', '없다', '아직 정하지 않았다'는 말로 삶에 대한 대화를 회피하고 있다.
자신의 미래에 대해 고민해야 할 당사자인 학생들이 주변의 눈치를 보며 생각을 닫고 대화를 닫으려고 한다. 미래에 대한 상상, 진로에 대한 탐색과 설계는 설레고 신나는 일이어야 한다. 수행평가처럼, 진급시험처럼 '주어진 시간에 해내지 못하면 실패하는' 숙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상담을 시작할 때 '진로를 결정하지 못해서 스트레스예요.'라는 말을 하는 학생들의 경우, 스스로 느끼는 불안과 걱정보다 다른 이들의 반응(걱정, 꾸중, 핀잔 등) 때문에 마음이 무거운 경우가 많다. 꼭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어찌할 바를 몰라 헤맨다면 교사와 부모가 적극적으로 도와야 하지만 그러기 전까지, 그래도 시간이 있을 때라면 자신만의 속도에 맞게 자기를 고민하고 미래를 그리도록 조금은 여유를 허락했으면 좋겠다. 누구보다 자신의 문제는 자기가 제일 걱정하게 마련이니까. 진로를 고민하고 결정하는 것이 스트레스가 아니라 신나고 즐거운 모험이 되기를 바라본다, 그 모험에 기꺼이 함께할 준비가 되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