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사적인 감상 뮤지컬 '오셀로의 재심'
2024년은 셰익스피의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공연이 꽤 많았던 해였다. 연극, 뮤지컬, 무용, 오페라까지 다양한 장르의 무대 예술이 공연되었고, 그의 작품을 기반으로 하지 않더라도 모티브로 하고 있는 크고 작은 공연들까지 하면 수백편이 대한민국에서 공연되었다.
2025년도 셰익스피어 열풍은 이어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공연예술 창작산실 '2025 올해의 신작'에 이름을 올린 뮤지컬 '오셀로의 재심'은 오랫동안 꺼내지 않던 책들을 다시 뒤적이게 했다. 애정하는 배우들이 출연하기도 했지만 내가 너무 좋아하는 '다시 바라보기'의 방식으로 쓰인 극이라 기대를 품고 동숭동으로 달렸다.그리고 자연스럽게 회전문을 돌고 있는 중이다.
◆오셀로 & 오셀로의 재심 살펴보기
윌리엄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 하나인 오셀로는 셰익스피어가 40세 되던 1604년에 무대에 올라간 작품이다. 그는 한창 잘나가는 극작가였고 당시 영국인의 평균수명을 넘어선 건강함도 소유하고 있었지만, 희극이 아닌 햄릿에 이은 또 하나의 비극을 창조해 냈다. 배우 자격으로 왕실에 머물던 시기에 만난 바바리 왕국의 대사(무어인-8세기 초반 이베리아반도를 다스린 아랍계 이슬람교도, 아라비아인과 흑인의 혼혈로 구성)를 만난 경험을 바탕으로 주인공 오셀로를 창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오디오북 해설집)
'오셀로의 재심'은 원작에 기반을 두었으나 그 줄거리를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에 함축적으로 제시되거나 생략된 부분(굳이 다루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이 있다. 극의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필요한 부분들을 압축했는데, 초연이고 창작산실 선정작인 점을 감안하면 나중에 재연에서는 조금 더 분량을 늘릴 수도 있겠지 싶다.
* 오셀로(희곡)
등장인물: 오셀로, 데스데모나, 이아고, 캐시오, 로데리고, 에밀리아, 비앙카, 브라밴티오, 몬타노, 장교, 베니스 공작, 상원의원들, 신사들, 글라티아도, 로도비코, 광대와 악사와 전령들 - - 장군이 되기까지 많은 고난을 겪은 오셀로, 베니스에서도 피부색과 외지인이라는 이유로 차별 경험
- 이아고는 오셀로 기수로 부관지위를 바라다가 무산되자 오셀로와 캐시오 등에 분개
- 데스데모나의 부친 브라밴티오는 딸의 결혼과 이주 후 상심하여 사망
- 에밀리아는 오셀로에게 손수건에 대한 진실을 말하고 그 앞에서 이아고에게 살해됨
- 이아고의 계략으로 캐시오를 해치려던 로더리고는 오히려 그의 칼에 상처를, 이아고의 칼에 사망
- 데스데모나는 죽는 순간 에밀리아에게 자결이라는 말을 남김
* 오셀로의 재심(뮤지컬)
등장인물: 오셀로, 데스데모나, 이아고, 캐시오, 로데리고, 에밀리아, 비앙카, 브라밴티오, 에리니에스의 세 여신(알렉토, 메가이라, 타시포네)
- 오셀로와 이아고, 캐시오의 관계에 대해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음
- 오셀로는후회하며 자결했으나 부인을 죽인 죄로 여신들의 판결에 따라 지옥에서 형별을 받고 있음 -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정의와 복수의 여신들이 재판관으로 등장하여 데스데모나 사후(死後) 시점에서 '신혼부부 살인사건'을 재심
- 오셀로와 데스데모나의 생전의 장면과 죽음 이후 혼들이 증언하는 법정의 장면이 교차
- 데스데모나가 자신의 입장에서 오셀로와의 사랑을 되돌아보고 자신이 오셀로에게 내리고 싶은 형벌을 제안하고 판결함
'재심'이 이루어지는 재판장의 주인인 세 명의 여신은 각기 바라는 바와 과거의 영향력 있던 삶에 대한 토로를 하는 인간적인 모습도 보여준다(이 내용은 공연장에서 확인하시길).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은 지극히 인간적일 때가 많기 때문에 여신들의 그러한 모습이 이상하지는 않지만, 왜 이 세 명의 여신이 등장해야 했는지가 중요한 포인트! 하고많은 신들 중에 왜 이들인가?
복수의 여신들인 이들은 말수가 적지만
한번 움직였다 하면 잔인하기가 견줄 데 없다.
......
울면서 그 죄인을 붙잡아 저승의 신 하데스에게 넘겨 버린다.
그런데 이들이 왜 우는가?
누군가를 대신해서 복수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좋아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신화를 이해하는 12가지 열쇠'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볼 때에는 크게 주목하지 않았던 여신들이었는다. 극 때문에 다시 찾아보니 작가님의 마음을 조금 알 것 같았다. 재미를 위해, 극에 활기를 더하기 위해 넣은 캐릭터가 아니었다. 죄인을 붙들어 오는 것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좋아서' 복수를 하는 여신들이라니..
* 에리니에스 : 복수의 여신들'로 자매들을 함께 칭하는 말. 혈육 사이에 일어나는 범죄에 대해 관여하는 여신들. 후에 아테나 여신의 권유로 '자비의 여신'으로 변화(계기가 되는 사건이 오셀로의 재심의 상황과 유사함)
* 알렉토 : 쉬지 않는 자, 비난의 여신, 죄인을 잡는 자
티시포네: 살인 응징, 심판의 여신, 불륜을 심판하는 자
메가이라: 질투의 여자, 처벌의 여신, 위대한 분노
아아, 억울해. 억울하게 살해됐어! 난 죄가 없는데도 죽어.
아무도 아니야- 나 자신이 한 짓이야. 잘 있어요.
친절한 서방님께 잘 말씀드려요. 아아, 잘 있어!
오셀로 5막 제 2장, 데스데모나의 마지막 대사들
우리가 주인공인 오셀로의 비극과 이아고의 사악함에 주목하는 사이, 가장 큰 피해자이자 가련한 인생을 마감한 데스데모나는 화려한 휘장 뒤에서 숨을 거두었다. 끝까지 진실한 사랑을 지키며,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고 분노하는 남편을 여전히 사랑하고 지키기 위해 이런 말을 에밀리아에게 남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사랑으로도 '죄가 없는데 죽는 억울함'은 승화시킬 수 없었던 모양이다.
최후의 심판 날, 당신을 만나게 되면
당신의 얼굴빛을 보기만 해도 내 영혼은 하늘에서 내팽개쳐져서
지옥의 악귀들이 덤벼들어 걸신스럽게 뜯어먹을 거요.
....
아, 저주받은 천하에 잔인무도한 이 몸! 악마들이여,
이 천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날 채찍질하여 쫓아다오!
저 모진 바람 속에 날 휘몰아 내다오! 유황불 속에 나를 지글지글 태워다오!
타오르는 지옥의 불바다 속에 깊숙이 담가다오!
오셀로 5막 2장, 오셀로의 후회
오셀로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절규하며 칼에 몸을 맡긴다. 그리고 아내에게 입 맞추며 생을 마감한다. 우리는 오셀로의 이러한 최후를 바라보며 연민과 동정을 보내곤 한다. 그런데 데스데모나의 입장에서 본다면 오셀로의 이런 죽음은 과연 '충분한 벌'로 이해될 수 있을까? 아니면 명예를 위해 한 행동이라는 그의 변명처럼,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도 그의 명예에 한 획을 더하는 모습으로 보였을까?
◆ 셰익스피어를 다시 보는 시대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매일 한 번 이상 공연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가 셰익스피어를 읽는 것이 아니라 셰익스피어가 우리를 읽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출처: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오디오북) 그의 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옛사람'이 아니라 '지금의 우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현대성을 지니고 있다. 그의 작품 속 사건들 역시 시대와 문화적 배경은 다를지 모르나 우리가 보고 듣고 겪을 수 있는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삶'이기에 끊임없이 무대에 올려지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일차적으로 주목하게 되는 인물과 사건 외에도 아주 조금만 더 다가가서 살펴보면 또 다른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이 자기소개를 하는 것처럼 주절주절 쏟아내는 이야기도 잘 들여다보면 그의 인격과 사회적 위치의 형성에 대한 짧지 않은 이야기들을 찾아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가 바뀌어도 인간의 삶에 대한 반성과 통찰을 얼마든지 끌어낼 수 있는 것 아닐까? 그저 지고지순한 슬픈 사랑 이야기에서 끝나지 않고 약자와 억울한 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기회, 시야를 가리고 있는 커튼 너머를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면서 주인공에게만, 목소리가 큰 이들에게만 주목했던 우리를 돌아볼 수 있는 장을 펼칠 수 있도록 말이다.
◆ 지극히 사적인 감상
좁은 무대, 어깨가 닿는 객석은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온몸으로 연기하는 베테랑 배우들을 보면서 그리고 매 공연마다 좁은 로비에서, 공연장 위 카페에서 극에 대해 열렬히 토의하는 관객들 사이에서 '그래 이게 대학로 맛이지' 하는 희열도 느꼈다. 원작을 존중한 대사, 원작의 무게를 살려주는 악기의 편성, 여신들의 합창은 그리스의 비극(tragedy)을 떠올리게 했다. 빙의라는 소재는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지만, 극의 효율성을 높이는 데는 더없이 적절했고 배우들도 다른 결의 인물을 그 때마다 잘 표현해 주었다. 정작 불편함은 내가 애정하는 배우와 연기하는 캐릭터를 동시에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정말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불편함... 그만큼 연기가 좋았다는 것이겠지.
아름다운 선율에 얹힌 지독한 변명이 주는 불편함.
그 불편함의 시간을 견디고 나니 비로소
데스데모나의 눈으로 사건이 보이기 시작했다.
애정하는 배우를 보면서 마음이 불편했던 100분. 명예를 위한 행위라는 대사는 연극 무대에서도 익히 보아왔고 희곡으로 읽을 때에도 '그냥 그렇구나'하면서 지나갔었다. 별 느낌 없던 그 말이 서정적인 선율에 얹어지니 지독히 불편했다. 선하고 당당한 표정과 설득력 있는 목소리에 얹어진 변명, 거룩한 성가의 곡조에 신성을 모독하는 가사를 얹은 듯한 그 불편한 순간을 통과하니 비로소 데스데모나의 눈으로 법정이 보이기 시작했다.
죽는 순간까지 사랑했지만 억울하게 청춘을 마친 자신과 다르게 폼 나게 마지막을 맞이하는 오셀로를 볼 수 있었다면, 데스데모나는 눈물을 흘렸을까 아니면 화를 냈을까? 원작의 내용을 살려내면서도 데스데모나의 결정에 따라 마무리되는 재판, 오셀로가 절규하며 무대의 불이 꺼지는 그 순간에도 나는 여전히 데스데모나가 오셀로를 사랑한다고 느꼈다. 오셀로에 대한 태도 변화는 데스데모나가 아닌 관객들에게 가장 크게 일어나지 않았을까 싶다.
너무나도 비극적인 사건.
진짜 비극은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는
우리의 이야기가 아닐까?
작가님의 의도를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작가님이 원했던 것은 것은 셰익스피어의 오랜 이야기를 뜯어고치는 것이 아니라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고 손 내밀어야 하는 사람을 외면했던 우리'를 뜯어고치는 것이 아니었을까? 오셀로의 무너지는 삶이 비극이 아니라 우리의 어두워진 눈과 귀와 마음이 비극이 아닐까...
◆ 뮤지컬 오셀로의 재심 공연 개요
* 공연 일정 : 2025년 1월 8일~ 1월 26일
* 공연장소 :SA Hall
* 제작 : 컬처인 컴퍼니
* 출연
- 오셀로 : 고영빈, 고훈정 - 데스데모나 : 박란주 - 이아고 : 김찬호, 오종혁
- 알렉토 : 한세라 - 메카이라, 에밀리 : 김지혜 - 티시포네, 비앙카 : 이예지
- 서기, 오데리고, 캐시오 : 김욱 - 군인, 변호사, 브러밴쇼 : 장재웅
https://youtu.be/uWkgZP-UNzc? si=qbgAQPxqTyYXGH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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