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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은초 Mar 31. 2016

치앙마이, 트레킹의 도시

허니문을 가장한 하드코어 배낭여행(5)

까마귀 고기 삶아먹고 트레킹 떠난 날


오늘은 트레킹을 하기로 했다.

나를 괴롭힌 장염이 아직 다 물러간 건 아니지만, '정글숲의 오지'를 상상하게 했던 치앙마이인 만큼 트레킹을 빼놓기란 영 아쉬운 일이었다. 아름답고 쾌적한 도시의 모습과는 별개로, 치앙마이는 단연 트레킹의 도시다. (도시와 자연이 이토록 멋지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이 또 있을까 생각해봤다. 떠오르는 곳이 없다) 치앙마이의 여행자 거리에는 수없이 많은 여행사가 있고, 모든 여행사가 다양한 트레킹 상품을 판다. 당일, 1박 2일, 2박 3일 등 다양한 일정이 있고, 그에 따라 코끼리 타기, 래프팅, 지프라인 등의 액티비티가 결합되는 형식이다. 숲속 트레킹을 좀 하고, 코끼리를 타 보고, 고산족 마을에서 하룻밤을 잔 뒤 래프팅을 하고 돌아오는 1박 2일 코스가 가장 일반적이다. 여행사마다 가장 주력하는 상품이기도 하다.

  

우리가 찾아간 여행사의 아줌마는, 정말이지 뷰티풀하고 환타스틱하며 어메이징한 경치를 볼 수 있는 2박 3일 트레킹이 있는데 조인하지 않겠냐고 계속 꼬셔댔다. 자기 가족들끼리 운영하는 프라이빗 프로그램이라고 했다. 귀가 솔깃했지만, 현재 나의 비루한 몸 상태로 숲속에서 잠을 자는 건 아무래도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글에서 탈이 나면 답도 없으니까, 크게 욕심내지 않고 당일 프로그램 중에서 고르기로 했다.


우리의 원칙은 두 가지였다. '코끼리를 타지 않을 것', 그리고 '여타의 액비티비 없이 순수하게 숲길을 걸을 것'. 하지만 거의 모든 프로그램에 코끼리 라이딩이나 레포츠가 들어있었고, 우리가 원하는대로 "원 데이, 노 코끼리 라이딩, 노 액티비티, 저스트 워킹"을 추려내니 딱 하나가 남았다 -_- OFF THE BEATEN TRACK이라는 타이틀이 달린 브로슈어에 큼지막한 두 단어가 씌어있었다. Only Walking! 그리하여 우리는 이른 아침 정글숲을 걷고, 고산부족을 방문하고, 박쥐 동굴도 가고, 폭포에서 쉬기도 하다가 늦은 오후 치앙마이로 돌아오는 원데이 트레킹 코스를 (선택의 여지 없이) 결정했다.



오전 8시 출발.

태봉은 (군대 훈련 제외하면) 트레킹이 처음이라고 했다. 나는 원래 산타기에 젬병인 여자. 설상가상으로, 마추픽추 트레일에서 고산병에 걸려 이승과 작별할 뻔 하다가, 산소호흡기를 쓰고 구조된 이후 트라우마까지 갖게 된 여자. 사실, 하루짜리 트레킹을 선택한 건 (장염은 핑계고) 여전히 산이 무서워서..ㅠ 그래도 원데이 트레킹은 별로 힘들지 않은 코스라고 했으니까.... 여행사에서 분명히 그렇게 말했어.....

출발 직후 찍은 첫 사진이자, 점심 전까지 찍은 유일한 사진. 카메라는 오전 내내 배낭에 처박혀있었다.


트레킹을 시작하자마자, 나는 눈 앞에 들어온 광경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헐. 이게 뭐야. 숨이 좀 차오르게 걷는 정도를 예상했는데, 가파르게 기울어진 바위투성이의 산비탈길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게다가 오르막도 아니고 계속 내려가야 하는 길이었다.

도망쳐야 한다!

나는 길을 본 순간 깨달았지만, 이미 산 속이라 도망갈 구석이 없었다ㅠ 천 길 낭떠러지 절벽 위를 등산하는 기분으로 한 발 한 발 내려갔다. 지옥같은 트레킹 코스가 초반부터 펼쳐졌다. 난 어쩌자고 또 산에 왔을까ㅠ 마추픽추에서, 실은 과테말라에서 활화산을 오르다 한 번 더, 죽을 고비를 넘겨놓고. 내가 미쳤지. 내가 또 까마귀고기를 삶아묵었구나ㅠㅠ

가파른 내리막길은 몹시 미끄러웠다. 우리는 별도의 별도의 트레킹화를 챙기지 않았고, 여행에서 막 신고 버릴 심산으로 밑창도 다 헤어진 운동화를 신고 온 터였다. 아무리 조심하며 걸어도 자꾸 발을 헛디뎠다. 발이 미끄러지면서 비탈길에서 휘청거릴 때면 확 두려움이 덮쳤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몇 배의 난코스였다. 두 세 걸음에 한 번씩 발을 헛디디자 울고 싶어졌다. 나는 거의 땅에 엉덩이를 붙이고 썰매 타는 자세로, 네 발로 기다시피 산비탈길을 내려갔다. 한 손은 땅을 짚고, 다른 한 손은 주변의 넝쿨이나 나무 가지를 움켜쥐고서 한 발 한 발.


가파르고 좁은 내리막길이 30분이 지나도록 이어졌고, 그 뒤로도 경사가 조금 완만해졌다가 험해졌다가를 반복할 뿐 내리막길은 끝나지 않았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발에 얼마나 힘을 빡 주고 걸었던지, 급기야 발목이 시큰거리고 종아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우리 팀의 가이드 톰은 팔짝팔짝 뛰다시피 앞서가고, 다른 멤버들도 깔깔 수다도 떨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잘도 걸어간다. 그 와중에 얼굴이 온통 벌개져서 땀에 젖은 채, 그걸 닦아낼 여력도 없이 더없이 진지하고 더없이 고뇌에 찬 얼굴로 걷고 있는 나. 그리고 그 곁에서 나의 외로운 사투를 돕고 있는 한 남자, 태봉.  


그는 흙길을, 바위를 나보다 한 발 앞서 걷고 발을 디딜 곳을 알려주었다. 그도 번번히 넘어지고 미끄러졌는데, 그러고는 벌떡 일어나 내가 그곳을 밟지 않도록 일러주거나 손을 잡아주었다. 혼자서 내려가지 못할 비탈길이나 험한 내리막길에서 무서워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마다, 그는 내가 의지할 전부였다. 태봉은 그 길 내내 나와 함께 맨 꼴찌로 걸었다. 태봉이 없었다면 그 길이 막막해서 어쨌을까.   


나는 걸으며 저 너머 까마득해보이는 숲 속을 가늠해보곤 했다. 이 길은 어디까지일까. 이 길의 끝은 언제일까. 아까 가이드 말로는 폭포에서 점심을 먹을 거라고 했다. 그때는 좀 쉴 수 있겠지? 그래도 한 시간은 주겠지? 언제쯤 도착하려나? 이 길도 점심 먹을 무렵에는 끝이 나겠지.

그리곤, 한 숨 한 번 내리쉬고 다시 걸었다.  

내리막길 다 내려와서. 살아남은 기념샷

마침내 폭포에 도착했다! 나는 "이제 점심 시간이예요. 한 시간 쉬세요!" 이런 말이 나오기만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는데, 나의 애타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이드는 폭포 다이빙에 여념이 없다ㅠ 나도 안에 수영복을 입고 오긴 했지만, 이미 직립보행이 힘겨워진 나의 후들거리는 다리로는 다이빙이고 뭐고 그냥 절벽에서 고꾸라지는 모양새가 될 것이다. 타잔놀이를 마치고 나온 가이드가 점심은 조금 더 올라가서 먹자고 한다. 그리고는 억장이 무너지는 내 슬픔을 알았는지, 저기 바로 위라고 친절하게 덧붙여주었다. 기를 쓰고 올라갔더니, 정자 같은 평상이 나왔다. 드디어 점심시간이다ㅠㅠ

내가 죽을똥살똥 걸을 때 같은 거리를 다섯번씩 뛰어다니던 개님

도시락은 대나무잎에 싼 볶음밥과 닭다리 하나씩이었다. 이게 얼마나 맛있었을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매콤하고 짭조롬하게 양념이 벤 닭다리는 한 열 개쯤은 먹어치울 수 있을 거 같은데. 아쉬운 마음에 손가락에 묻은 양념이라도 쪽쪽. 도시락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저마다 싸 온 간식도 나눠먹었다. 같이 트레킹을 떠나온 멤버들과도 비로소 제정신으로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었다.

꿀을 바른 점심시간이 지나고, 가이드는 이제 내리막 대신 오르막을 갈 거라고 했다. 기뻤다. 오르막은 숨이 턱에 찰 지언정, 무섭지는 않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평지가.. 꿈에 그리던 평지가 나왔다ㅠㅠㅠㅠㅠㅠㅠ (눈물 오백 개쯤 필요함 ㅠㅠㅠㅠ) 가슴을 쓸어내리고, 평지를 걸어가는 길이 그렇게 편안하고 기분 좋을 수가 없다. 이후로는 평지와 오르막, 내리막이 번갈아가며 나타났다.

오후에는 계속 걷기보다 산 속의 소수부족 마을을 방문한다든지, 숲속의 나무와 벌집을 관찰한다던지 하는 시간이 많았다. 덕분에 키 높은 열대 나무와 탐스럽게 피어난 꽃가지, 밭에 심겨진 작물과 길가 주변에 피어난 들꽃도 바라보며 걸을 수 있었다. 얼굴에 닿는 차가운 바람도 느껴지고, 눈길을 사로잡는 풍경에 이따금 길을 돌아보기도 했다. 오르막길도 수월하진 않았지만, 길을 따라 이어지는 격려에 힘을 내어 볼 만 했다.

     


목표 지점에 다 와갈 때. 뒷모습이 저리 짠했다니ㅠ

길가에 누워있는 내 키 만한 나무 가지를 주워 지팡이를 삼았다. ㅎㅏ. 이렇게 편하다니! 지팡이는 내리막길에서 균형을 잡고 몸을 지탱하는데 어마어마한 도움이 되었다. 진작 만들걸ㅠㅠ


결승 지점에 골인하듯 지팡이를 마구 휘저으며, 마침내 목표 지점에 도착했다. 그제야 내 꼬락서니를 돌아보니 바지 엉덩이는 말할 것도 없고 온 몸이 흙투성이였다. 팔에는 이곳저곳 찰과상이 나 있었다. 다리는 너덜너덜. 종아리에 백킬로짜리 모래주머니를 달아논 듯, 다리 한 짝을 들어올리기도 힘들었다. 벌써 이 정도인데, 내일 아침 일어나면 죽겠구나 싶다.

도오오오오착!

내 인생에 트레킹을 또 하게 될 날이 올까?


이렇게 써놓고 생각해보니, 이 똑같은 생각을 예전에도 했던 것 같다. 힘들어도 성취감 때문에, 이런 건 개뿔이고. 난 그냥 잘 까먹는 인간인 거 언젠가 또 까마귀 고기를 삶아먹는 날, 난 또 엉엉 울며 산을 타겠지. (계속)



원래는 다음날 했던 쿠킹클래스까지 이번 연재글에 넣으려고 했으나, 이날의 죽을똥 살똥 트레킹 이야기에 어느덧 용량 초과 ㅎㅎ 나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쿠킹클래스 이야기는 다음 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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