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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은초 Apr 05. 2016

치앙마이에서 이룬 요리수업의 꿈

허니문을 가장한 하드코어 배낭여행(6)

원데이 쿠킹 클래스  


나는 (곤충이나 징그럽게 생긴 것들만 빼면) 낯선 이국의 음식에 거부감이 거의 없는 편이다. 아니, 오히려 환장하도록 좋아하는 편에 가깝다. 특히 태국 음식은 전 세계 요리 중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음식이기도 하다. 달콤하고 진한 코코넛 풍미는 말할 것 없고, 특유의 향신료도 내 입엔 너무너무 잘 맞는다. 팍치(고수)는 내 사랑, 모름지기 팍팍 얹어먹어야 한다. 한국에서 쌀국수 집을 갔는데 팍치를 안 주면 이러고도 쌀국수 집이냐고 구시렁구시렁. 내가 특히나 좋아하는 태국 음식은 똠양꿍, 팟타이, 푸팟퐁커리, 마사만 커리. 하지만 한국에서 사 먹으면 그 맛이 안 나거나, 너무하다 싶게 비싸거나 둘 중 하나이기 마련.

사진 순서대로 똠양꿍, 푸팟퐁커리, 캐슈넛 치킨 볶음밥, 쏨땀, 그리고 나의사랑너의사랑 코코넛 주스.


집에서 이런 음식들을 뚝딱 만들어낼 줄 안다면 얼마나 좋을까. 웍처럼 깊은 프라이팬에 숙주, 계란, 쌀국수를 넣고 재빠른 손놀림으로 휘리릭 볶아내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커리 페이스트와 코코넛 밀크를 달달달 볶아낸 그린 커리도 상상해본다. 아아아 근사하다 근사해!! 팍치도 내 맘껏 팍팍 넣고!!


태국 요리를 배워보고 싶은 바람이 생겼다. 태국 현지의 부엌에서 새로운 식재료를 배우고, 그곳에서 자라는 낯선 풀과 향신료를 내 손 끝으로 경험하며 요리를 해보는 거다. 국적도 저마다 다른 여행자들이 낯선 이국의 키친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 새로운 맛의 세계를 탐하는 상상.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상상이 아닐 수 없다.



드디어 그 바람이 이루어질 날이 왔다. 음식으로도 유명한 치앙마이에는 수준 높은 쿠킹 스쿨이 많이 있다.(여긴 대체 없는 게 무언가!) 종일반도 있고, 반나절도 가능하다. 시내에서 간편하게 배울 수도 있고, 기차를 타고 멀리 떨어진 농장에 가서 직접 작물을 만져보며 배울 수도 있다. 나는 죽을똥 살똥 트레킹으로 다리가 후달거려서 농장은 마음을 접고, 시내에 있지만 작은 텃밭을 가지고 있는 쿠킹 스쿨을 선택했다. 숙소와도 걸어서 10분이면 도착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오전 9시, 쿠킹클래스 시작.   

키친 테이블에 12명의 참가자가 둘러앉았다. 본격적으로 요리 수업을 시작하기 전, 각자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이 주어졌다.

"한국에서 온 Ko & Bae라고 해요. 지금 허니문 중이에요"  

여기저기서 오, 러블리! 쏘 스윗!을 외쳐대는 와중에, 이게 웬일! 같은 테이블에 우리와 마주 앉은 미국인 커플이 자신들도 허니문 중이라지 뭔가. 오마이갓, 이런 달콤한 키친 테이블을 보았나!


저마다 국적과 이름 소개를 마치고, 선생님이 오늘의 클래스에 대해 알려준다.

쿠킹클래스 참가자는 볶음요리, 샐러드, 커리, 커리페이스트, 수프, 디저트 이렇게 6개의 카테고리에서 4개의 카테고리를 골라 저마다 원하는 메뉴를 배워볼 수 있다. 여기에 스프링 롤은 기본으로 끼워준다. 태봉과 나는 최대한 여러 요리를 배워 합체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전부 다른 메뉴를 골랐다. 나는 팟타이, 똠얌꿍, 레드 커리페이스트, 레드 커리를 골랐고, 태봉은 캐슈넛 치킨 볶음, 똠삽(똠얌꿍보다 맑은 국물에 매콤새콤), 그린 커리 페이스트, 그린 커리를 골랐다.

메뉴를 고르고 나자, 선생님이 묻는다.

"혹시 채식주의자 있나요? 채식주의자라면 채식 재료를 따로 준비해 줄 거예요."

내가 손을 들었다.

"제 남편이 채식주의자인데... 음.. 근데, 닭고기는 먹을 줄 알아요."

선생님은 태봉이 고른 메뉴들을 들여다보더니, 호탕하게 답한다.

"자, 우리 클래스에는 채식주의자가 없는 걸로~!"

다들 깔깔 웃고, 태봉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내 귀에 속삭인다.  

"그래서 내가 암말 않고 있을라 그랬는데..ㅠㅠ"

쪽팔려마 서방. 다 자기를 위해서 그런 거야 ㅎㅎ



1교시는 재료 탐색. 뒷마당 텃밭에서 자라는 갖가지 야채와 허브를 뜯고, 만지고, 비벼보고, 향을 맡고, 먹어보는 시간이다.


"지금 보시는 건 레몬 그라스예요. 똠양꿍의 시큼한 향이 바로 여기에서 나오죠."

"이건 뭐죠? 네 맞아요, 고추예요. 좀 있다가 요리할 커리의 종류가 이 고추 색으로 결정되죠. 빨간 고추를 쓰면 레드 커리, 녹색 고추를 쓰면 그린 커리가 되는 거예요."



우리가 만들 요리에 쓰이는 갖가지 재료를 익힌 후, 2교시 현지 마켓 탐방에 나선다. 이름도 모르는 풀과 허브, 생전 처음 보는 야채와 과일, 각종 페이스트와 양념들을 선생님의 설명을 곁들여 구경하고, 장도 본다. 사고 싶은 게 어찌나 많던지, 마치 저 식재료들과 양념 페이스트만 있으면 한국에 가도 태국 요리는 거뜬할 거 같은 생각에 마구마구 장바구니에 쓸어 담아봤다. (태봉의 근심 가득 힐끔힐끔에 다시 덜어내긴 했지만..)


이렇게 장을 보고 구경을 마치면, 다시 학원으로 돌아와 본격적인 요리가 시작된다. 뒤뜰에는 저마다 쓸 수 있는 조리대와 프라이팬이 준비되어 있었다. 엄청난 화력이 뿜어나올 듯한 조리대와 속이 깊은 무쇠 프라이팬을 보니, 가슴이 두근두근. 이렇게 로망이 이루어지는구나!

이제부턴 선생님의 지도 아래, 각자 재료를 다듬고 본인이 선택한 메뉴를 만든다. 내가 만든 첫 번째 음식은 팟타이.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마늘을 볶다가, 튀긴 두부와 닭고기를 넣고 볶는다. 달달달 볶은 재료를 한쪽 구석으로 밀어놓고, 계란을 푼다. 계란익으면 역시 한쪽 구석으로 민다. 물을 약간 붓고, 쌀국수 면을 투하한다. 여기에서 불을 이빠이 세게 올리고! 엄청난 화력으로 재빨리 볶아내는 것이 포인트!! 화르륵 화르륵!! 피쉬소스와 굴소스로 간을 맞춘 뒤, 숙주와 파를 넣고 몇 번 휘저어주면 끝! 먹기 전에 땅콩 가루와 고춧가루, 라임 등을 뿌린다. 이렇게 한 가지 메뉴가 완성될 때마다, 각자 만든 음식을 들고 키친테이블에 둘러앉아 함께 먹는다.

팟타이와 캐슈넛 치킨 볶음밥. 우리가 만든 첫 태국 요리! 

 

세상에. 이렇게 맛있어도 되나?

아. 이건 진짜 대박. 파는 거보다 더 맛있잖아?  

주여, 진정 이 요리를 제 손으로 만들었단 말입니까!!


자신이 한 요리에 이렇게 감탄하냐며 비웃겠지만, 장난 아냐. 나 지금 진지해. 그리고 실은, 모든 이의 요리가 진짜진짜 맛있다. "나 네가 만든 거 한 입 먹어봐도 돼?" 물어보면, 요리를 만든 이는 주저 없이, 긍지에 찬 얼굴로, 어서 먹어보라며 그릇을 내밀어준다. 먹어보면 엄지가 절로 치켜 올라가는 맛이다. 선생님의 레시피 설명을 받아적느라, 요리하랴, 사진 찍으랴 정신없이 분주하면서도 행복한 시간이 그렇게 흘러갔다. 수업을 마칠 때는 모든 요리의 레시피가 담긴 작은 책자도 선물해준다.

 

똠양꿍과 레드커리 만들기. 레스토랑에서 사 먹은 것보다 더 맛있었다. 츄릅-


태봉은 한국으로 돌아가면 오늘 배운 요리 다 해주겠다며 의기양양하고, 나는 "좋아, 좋아!" 대답했지만 속으로 생각했다. '레서피는 있지만, 지금 이 맛은 나지 않을 거야.' 이곳의 날씨, 온도, 분위기가 어우러지고 지금 이곳에 있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맛이라는 게 있으니까. 하지만 그러면 또 어떤가. 두고두고 행복한 기억이 될 '그때 그 맛'이 하나 더 생긴 것이다. 



이렇게 여행지에서 요리를 배워보고 싶다는 로망은 이루었으나..

이날 쿠킹클래스의 기억이 너무 좋은 나머지..

앞으로 여행하는 나라마다 쿠킹클래스를 들어보겠다는 더 큰 버킷리스트가 생기고 말았으니..!


다시 상상해본다.

먹어보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세상의 수많은 낯선 식재료들을 킁킁 맡아보고, 만져보고, 볶아보고, 튀겨보는 모습을. 그리고 내 안에 산처럼 쌓여갈 '그때 그 맛'의 목록들을. 그 상상을 하니 왠지 웃음이 난다. 크크. 맛으로 쌓는 행복의 기억이라니! 소녀, 아직 맛보아야 할 세계가 무궁무진하옵니다.



수업을 마치고, 오후에는 거리를 거닐었다. 그날 볕이 참 좋았고, 마음 깊이 행복했다. 

이곳에서 일 년쯤 살고 싶다. 천천히, 느릿하게, 여유롭게. 


그리고 이젠, 빠이로 간다. 

내가 그토록 오랫동안 가고파 했던, 여행자의 마을 빠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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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네 번째 사직서 

1. 설레기는 개뿔 

2. 세계 제일의 배낭여행자 거리는 어디로 갔나 

3. 두려움의 벽이 허물어진 자리, 오늘의 시간이 스며들다. 

4. 치앙마이, 네가 좋아 

5. 치앙마이, 트레킹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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