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니문을 가장한 하드코어 배낭여행 (프롤로그)
나와 태봉은 1년 반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다.
그의 프로포즈는 역대급이었다.
프로포즈의 규모나 반짝이는 아이의 크기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그 즉흥성이 역대급이었다는 말이다.
긴 배낭여행에 대한 목마름이 올라올 때마다, 언제 한 번 태봉(그의 별칭)과 함께 커다란 배낭 메고 제대로 된 여행을 해보고 싶었다. 태봉 역시 세상 최고로 재미있고 감동적인 여행도서는 하드코어 세계일주라며 (내 책이다ㅎㅎ) 저자와의 여행을 늘 고대해왔다. 어느 날, 카페에서 차를 홀짝거리다가 운을 떼보았다.
"우리 올해 여행 가볼까? 가을이나 겨울쯤 어때?"
그가 왠일인지 침묵한다.
'흥. 안 가겠다면 나 혼자라도 갈테다'
이런 생각을 하며 앉아있는데, 그가 침묵을 깨고 꺼내는 말.
"여행 가자. 그리고... 결혼도 하자!"
"당신은 이제까지 혼자 여행해왔잖아. 누군가와 잠시 일행이 되기도 했다가 다시 또 헤어지고, 혼자인 여행을 계속해왔을 텐데.. 이제, 내가 당신 여행의 동반자가 되고 싶어. 자기 힘들고 무거운 거 함께 지고 싶어."
그가 내게 청혼했다.
와 이런 순도 100의 즉흥 프로포즈라니. 그는 이게 정식 프로포즈는 아니라고 했지만- 근데, 그 무슨 이벤트로 치장을 했대도 그렇게 놀랍지는 않았을 것이다. 보통 남자들은 스스로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해야 비로소 결혼 얘기를 꺼낸다던데. 우리는 아직 준비의 준비 운동도 하지 않던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그놈의 준비가 되길 기다릴 필요가 꼭 있나. 나의 짐과 그의 짐이 더해지면 짐이 더 무거워질까? 우리는 오히려 서로의 무게가 조금은 더 가벼워질 것이라 믿었다. 최소한 1 더하기 1이면 2가 되었지, 3이나 4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대한민국에서 결혼을 위해 필요한 백 두가지 정도의 리스트들은 두려울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내 무거운 것, 함께 지어준대잖아. 그래, 나도 늙어서 이젠 혼자 여행 못 다니겠어. 그래서 나는 국민짐꾼 이서진보다 우월한, 오직 나만을 위한 맞춤 짐꾼을 들이기로 했다.(응?)
우리는 작은 결혼식을 올렸다. 우리만의 방식으로, 우리들의 이야기를 담아, 소중한 시간을 내어 와준 하객들과 함께 기쁜 날을 보내고 싶었다. 우리는 많지 않은 하객들께 일일히 직접 만든 청첩장을 보내고, 함께 즐길 수 있는 예식의 순서와 방법을 고민하고, 마음을 다한 언어로 혼인서약서를 써내려가고, 오신 분들께 나눠드릴 작은 선물과 메시지를 제작했다. 결혼식 당일, 나는 신부대기실에 꽃처럼 앉아있는 대신, 예식장의 로비를 씩씩하게 활보하며 오신 하객들을 함께 맞이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하객들은 신부가 입장하기 전, 다함께 A4용지에 새로 출발하는 신랑신부에게 축하의 메시지를 적은 다음 그 종이를 접어 종이비행기를 만들었다. 그 비행기는 신랑신부의 첫 행진의 길에 하객들의 손을 떠나, 예식장 가득 날아다녔다.
무엇보다 의미깊었던 시간은, 혼인서약서를 낭독하던 시간이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한 언약을 맹세했고, 또한 하객들 앞에 앞으로 우리 두 사람이 함께 살고자 하는 삶의 모습을 서약했다. 하객들은 증인이 되어, 회중의 서약 부분을 함께 낭독했다.
서약의 항목 중에는 이런 내용들이 있다.
또한 우리는 세상에서 유행하는 것들에 휩쓸리지 않고
우리들만의 방식으로 꿈을 꾸고, 시도하고, 자연과 삶을 향유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돈에 저당 잡히지 않은 상상력과 용기를 바탕으로
소박하고 자족하는 삶, 창조적이고 생명력 있는 삶, 이웃을 풍요롭게 하는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만의 방식으로 이 서약을 충실히 이행하는 한편, 태봉의 프로포즈 서약도 이루어주기로 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허니문으로 한 달 배낭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사실 허니문으로 장기 배낭여행을 떠나는 건 나의 오랜 꿈이었다. 긴 배낭여행이야 수없이 해보았지만, 결혼을 안 하고 있으니 긴 허니문은 이룰 도리가 없어 오래오래 묵은 로망이 되고 말았다. 그 사이, 나는 점점 더 많은 나라들을 여행했고, 내가 여전히 가보고 싶은 장소는 몇몇 곳들만이 남았다.
그 중 한곳은 오로라였는데, 옴짝달싹하기도 싫은 추위 속에 허니문을 보내기는 그래서 탈락했다.
다른 한 곳은 호주였는데, 나의 여행이 처음 시작된 장소였고 사랑하는 사람과 나중에 다시 와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곳이었다. 그래서 호주행 비행기를 탈 뻔 했는데, 막판에 탈락했다. 호주는 뭐랄까, 너무나 안락한 여행장소였다. 여행을 위한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는 나라였기에 오히려 탈락한, 애석한 케이스다.
나는 오랜만에, 진짜 여행다운 여행이 고팠다. 태봉은 배낭여행도 처음이고(사실 그는 미국동부와 캐나다를 2주 정도 여행한 적이 있는데, '캐리어'를 끌고 다녔다며 '배낭여행'으로는 치지 않겠다고 했다. 풉), 장기여행도 처음이라 이왕 여행하는 거, 진짜 제대로 레알 배낭여행을 하며 함께 바닥을 쳐보기로 했다. 그래서 우리의 신혼여행은 아시아, 그 중에서도 인도차이나가 되었다.
직장을 가진 이후로, 여행을 위해 내가 던진 사직서는 몇 번이었을까?
2003년 세계일주를 위해 (아직 학생이긴 했지만, 여행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휴학하고 회사에 다녔다.)
2007년 북미로부터 남미까지 미대륙 종단을 위해
2012년 국내일주 및 탈서울을 위해
2016년 허니문을 가장한 한 달 인도차이나 여행을 위해
여행을 위해 던진 네 번의 사직서는 내게 어떤 의미를 남겨주었을까.
첫번째 돌아와서. 어디서든 살아남을 수 있는 잡초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남들 한 번 겪기도 힘들 사건사고를 유난히도 많이 겪으면서, '모험으로 사는 인생'이란 의미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힘들고 피하고 싶은 인생의 조각일지라도 나중에 돌아보면 그 각각의 경험이 각자의 자리에서 역할을 다하여 인생의 퍼즐을 완성해간다는, 나만의 퍼즐인생 철학을 마음에 견고히 세우게도 되었다.
두번째 돌아와서. 여행을 통해 새로 찾은 꿈이 있었다. 내 심장을 이토록 쿵쿵 뛰게 만드는 그 꿈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여행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재산은 배짱과 용기다. 인생의 모퉁이길을 두려워하지 않는, 아니, 두려운 마음이야 똑같지만 결국 꿈을 좇아 모험으로 살기를 선택하는 것. '못 먹어도 Go!'는 내 삶의 모토가 되었다. 결국 나는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대학 졸업한 지 십 년 만에 대학원에 들어갔고, 새로운 공부를 시작했다. 여행이 나의 취향과 관심사를 바꾸어놓더니, 결국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만들었다.
세번째 돌아와서. 설레고 가슴 뛰는 '일'을 하는 것에서 그러한 '삶'을 살아보는 것으로 관심의 폭이 확장되었다. 서울을 떠나 문화귀촌을 하기 위한 발판으로, 그간 관심을 두고 있던 소도시들과 지역 곳곳을 여행했다. 한 달 국내일주를 마치고 탈서울을 했다. 목표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싶은 곳에서, 세상에 보탬이 되며 살기'였다. 이 일환으로 '살고 싶은 도시에서 1년씩 살기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지역 전통시장 내의 상가를 임대해 공간을 새로 꾸미고 '어떤날연구소'라는 희한한 연구소를 차렸다. 세상의 소리에 흔들리지 않고, 나만의 고유한 이야기가 있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렇다면, 네번째 돌아와서는...?
그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