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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은초 Feb 26. 2016

설레기는 개뿔

허니문을 가장한 하드코어 배낭여행 (1)


# 아무도 모르는(알 수 없는) 신혼여행지 


신혼여행은 결혼식 3주 뒤로 예정되어 있었다. 나는 다니던 직장을, 태봉(남편)은 대학원 학기를 마무리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었다. 그래도 출발날짜까지 여유가 좀 있다는 안도감에서인지, 여행은 내 전문분야니까(?) 만만히 보여서인지, 예비 신부들이 가장 설레며 준비한다는 신혼여행에 도통 신경을 쓰지 못했다. 남들과 조금 다른 결혼식을 한 데다가, 모든 준비 과정을 누군가에게 의뢰하지 않고 직접 했기 때문에 결혼식 직전까지는 오롯이 그 준비에 매달려야 했고, 결혼식 이후에야 비로소 다른 것들에 손을 댈 수가 있었다. 


하지만 다니던 직장을 마무리하랴(결혼식 다음주 월요일부터 출근했다), 포탄처럼 쌓여있던 두 사람의 이삿짐을 풀어헤쳐 신혼집 구석구석 짜맞추어가랴, 여행 준비는 여전히 뒷전이었다. 가이드북이며 인터넷에 검색어 하나만 쳐도 수백수천개씩 나올 여행지 정보, 트립어드바이저, 주워들은 이야기, 언젠가 스크랩해두고 읽어보진 못한 글들, 그 나라를 이해할 수 있는 책과 영화 등등 섭렵해야 할 것들이 거대한 산처럼 느껴질 때마다 생각했다. 


  '괜찮아괜찮아. 3주나 있잖아. 그 안에는 어떻게 되겠지.' 

                                                           

그러나 어떻게 되지 않았다. 망했다! 출국 닷새 전까지 우리가 준비해놓은 거라곤, 방콕행 편도 항공권 두 장. 달랑 이게 전부였다. '일단 방콕으로 간다!' 이거 말고는 정해진 게 없었다. 여행지에 대한 정보 수집이나 숙소 예약 같은 건 고사하고, 어느 지역과 도시를 갈 지, 얼마나 머물지, 각 나라의 국경은 어떤 루트로 넘을지 모든 것이 미정이었다. 하긴 필리핀을 갈까말까, 인도네시아는 어떨까, 베트남도 좋겠지? 뭐 이런 고민을 하고 있던 판이었으니 말해 뭐하겠나. 우리의 신혼여행이 언제, 어디에서 끝나게 될지는 우리도 모를 일이었다. (이건 준비가 안 된 상황과는 별개로- 내 여행스타일이기도 했다. 어느 나라, 어느 도시가 마음에 들지도 모르는데 미리 다 일정을 짜두는 건 재미없으니까. 마음에 들면 머물고, 아니면 떠나고.)


3주간의 날들 - 집 정리, 부부가 되어 맞이한 첫 크리스마스 그리고 다가올 위기도 모른 채 평화로웠던 신혼먹방



# 신혼여행. 가느냐, 마느냐


그렇게 시간이 흘러 D-1.


새벽에 이상한 기운을 느껴 잠을 깼다. 속이 메슥거리는가 싶더니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통을 부여잡았다. 구토와 더불어 오한이 찾아왔고, 복부에 심한 통증이 있었다. 허리에도 통증이 느껴졌다. 겁이 나기 시작했다. 3년 전에 급성췌장염으로 무려 3주간 입원을 한 적이 있었는데, 딱 지금과 비슷한 증상이었다. 병원에서는 처음에 장염이라고 했다가, 맹장염이라고 했다가, 내가 허리 통증을 계속 호소하자 다시 검사를 실시한 끝에 췌장염을 발견했었다. 그때만큼 미친듯이 아프지는 않으니 설마 췌장염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이건 징조가 좋지 않다. 아니,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야! 나는 내일 아침이면 비행기를 타야 한다고- 그것도 기반시설이 열악한 인도차이나 반도로! 


밀려오는 오한과 통증, 그리고 두려움으로 밤을 꼬박 보내고 날이 밝자마자 택시를 타고 집 근처 병원으로 갔다. 병원에서는 여러가지 검사를 해보겠다고 했다. 하지만 췌장염인지 판단할 수 있는 CT검사를 하기 위해서는 일단 몸의 거부반응검사를 해야 한다고 했고, 그 전에 혈액검사 등 간단한 검사 몇 가지를 했고, 수액 주사를 맞고, 반응검사와 CT검사까지 마치고 나니 오후가 훌쩍 넘어있었다. 병원에서는 검사 결과가 나오기까지 두 어시간이 더 필요하니, 집에 가 있으라 했다. 나는 혼자서는 걷기가 어려울 정도여서, 태봉의 팔에 매달리다시피 병원을 나왔다.


오후 3시

나의 신혼여행은 어떻게 되는 걸까. 췌장염이 아니래도, 이 꼬라지로 여행을 간다고? 게다가 아직 짐조차 싸지 못했다. 그렇다면 취소를....? 항공권이며, 첫번째 여행국가인 태국에서의 숙소 예약이며 모든 것이 환불 불가능했다. 숙소는 며칠 전에, 허니문 초반이라고 나름 좋은 숙소들을 찾아 예약한 곳들이었다. 이렇게 돈도 날아가고, 신혼여행도 날아가나? 


가정 1) 췌장염이다 → 입원 필수. 가차없이 모든 것이 날아간다. 

가정 2) 췌장염은 아니지만, 출국은 무리다. 며칠 미룬다 → 저 돈을 쌩으로 날리고, 다시 예약한다고? 

가정 3) 췌장염이 아니다. 당장 출국한다 → 가서 몸이 더 안 좋아지면? 게다가 짐도 아직 꾸리지 못했다. 아파서 꼼짝을 못하겠는데. ㅎㅏ-

 

이런 기승전우라질. 오랜만에 찾아온 특급멘붕 속에 멍하니 앉아있는데, 병원에서 검사 결과가 나왔다며 연락이 왔다.  


오후 5시

"췌장염은 아니네요. 단순 장염입니다."

의사는 며칠간 통원 치료를 받으라고 했다. 우리의 여행계획을 털어놓았더니, "약을 처방해줄 수는 있지만..."이라며 말을 흐렸다. 일단 일주일치 약을 처방받고 병원을 나서는데, 태봉이 불편한 마음을 내비친다.   

"가도 괜찮을까? 췌장염일까 의심할만큼 아팠던 게 불과 몇 시간 전이었어." 

그의 부정적인 전망은 계속됐다. 

"약을 먹고 호전되리라는 보장도 없고, 현지에서 음식을 먹고 다시 아플 수도 있어."     

나라고 모를 리 없다. 나 역시 아까부터 수없이 되돌려보고 있던 가정 1,2,3 아닌가. 집으로 돌아온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격렬히 괴로워하다, 잠이 들었다. 밤새 한 숨도 자지 못했으니 멘붕 속에서도 까무룩. 


밤 9시

자면서도 무거운 마음에 눈을 뜨니, 어느새 밤이었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유명한 버나드쇼의 말이 딱 내꼴 아닌가! 이쯤 되니 반쯤 포기 상태가 되었다. 

"됐어. 다 때려치워!!!!!!" 

나는 엄한 태봉에게 분풀이를 했다. 삐뚤어질테다.  


밤 11시

새벽의 복통으로 시작된 위기는, 전혀 다른 방면으로 치닫고 있었다. '모든 것이 이미 늦었다'는 것에 나는 기분이 엉망이 되었고, 태봉은 '짐이 문제라면 지금부터 싸도 된다'고 했다. 나는 '그게 말이 되냐'고 받아쳤다. 헐렁할 때는 말도 못하게 헐렁하면서, 나는 때때로 쓸데없이 완벽주의 성향을 부릴 때가 있었다. 완벽하게 하지 못할 바엔 아예 시작하고 싶지 않은 마음, 혹은 어차피 망친 거 제대로 망가지고 싶은 그럼 마음. 이해할 이도 있을 것이다.


"이런 기분으로 무슨 신혼여행이야. 가지 마 가지 마! 설레기는 개뿔!"


(나는 정말 가지 않을 생각이었을까? 만약 그가 내 장단에 '그래, 그러자' 했으면 우리 부부의 신혼여행은 영영 사라지고 말았을 일이다. 아아 생각만 해도...)   



# 시작부터 하드코어 


새벽 4시반

그렇게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떠보니 새벽 5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어쩌면 움직여볼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일지도 모른다. 이미 늦었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자고 있는 태봉을 흔들어 깨웠다. 

"지금 새벽 4시 반인데, 지금이라도 짐을 싸볼래?" 

"응, 그러자." 

그렇게 우리는 출발 당일, 3시간만에 한 달간의 신혼여행을 준비했다. 여름 옷가지들과 온갖 여행용품이 방 안을 나뒹굴고, 막 정리가 끝났던 신혼집은 다시 개판이 되었다. 눈에 보이는대로 이것저것 배낭에 쑤셔넣은 뒤, 설거지통에 쌓여있던 그릇을 해치우고 쓰레기도 비웠다. 하지만 인터넷은 미처 정지시키지 못했고, 냉장고 안의 음식들은 고스란히 썩어갈 운명에 처했다.    


몸은 어제보다 한결 나았고, 일단 떠나기로 했다. 도착해서 방콕 현지의 병원에 가거나, 안 되겠다 싶으면 중간에 돌아오기로 했다. 몸이 회복될 때까지 태국 북부 산간마을로 이동하는 일정을 미루고 방콕에 더 머무는 것도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야말로 내 삶의 모토, "못 먹어도 Go!"를 또 한 번 충실히 실행하는 셈이었다. 내 여행 스타일이 워낙 마음가는대로이긴 하지만, 신혼여행조차 이러할 줄은 몰랐다. 어쨌든 우리는 예정대로, 여행의 첫 시작점인 방콕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허니-문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부터 하드코어하게. 


영영 남길 수 없을 뻔 했던(!) 허니문 출발 인증샷


나는 비행기 통로 쪽에 앉았다. 이젠 하늘 풍경 같은 건 관심이 없었다. 창문에 코를 박고 밖을 내다보던 태봉이 갑자기 나를 톡톡 건들였다. "봐봐. 너무 예쁘다."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가, "아아. 정말!" 탄성이 나왔다. 



이젠 봐도 설레지 않을 것 같은 하늘 풍경이었는데, 두둥실 떠오른 뽀얀 구름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눈을 떼지 못하는 나를 보고, 태봉은 아예 자리를 바꿔주었다. 착륙이 가까워오며, 구름 사이로 방콕의 풍경이 드문드문 보이기 시작했다. 


방콕에 왔다. 그리운 카오산로드. 여행자들의 성지이자, 우리 여행의 출발점으로 하고 싶었던 곳. 

'여기로부터, 오랜만에 진짜 배낭여행이 시작된다.' 

그 생각에 미치는 순간, 다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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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네번째 사직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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