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니문을 가장한 하드코어 배낭여행 (2)
때는 2000년 8월.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6년전.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끝내고 귀국하기 사흘 전, 방콕에 며칠 스탑오버를 하는 일정으로 비행기표를 변경했다. 호주에서 만났던 서양여행자들이 태국이 그리 좋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이야기를 하는 거다. 카오산로드가 어쩌고, 방콕이 어쩌고, 피피섬이 어쩌고.. 내 듣다 듣다 정말!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필이면 내 비행기표마저 타이항공 꺼였으니까.
하지만 서양여행자들의 열변 속에서 충분한 정보를 얻기엔 당시 내 영어가 짧았고, 가이드북도 없었으며, 인터넷 정보 따윈 있을 게 뭐야. 인터넷이라는 신세계가 막 열리고 있었을 시절인데. 어쨌든 비행기가 날 방콕까지는 데려다줄테니까, 뭐 어떻게든 되겠지.
방콕 공항에 도착해서 지도 한 장 받아들고, 택시에 올랐다. 뒷자리에 앉아 방콕 지도를 펴들고 촤악 훑어보니, 지도 가운데쯤 유난히 여러 길이 거미줄처럼 얽히고 설켜 촘촘한 곳이 있었다. 집 표시도 보이고, 사원 표시도 보였다. 그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택시 기사에게 말했다.
"여기로 갑시다!"
택시기사는 내 손가락이 있던 곳으로 날 데려다줬다. 그곳이 카오산로드였다. 택시에서 내려 몇 발짝 걷자마자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새로운 세계에 도착했다는 것을. 캐리어를 끌고 후미진 뒷골목을 헤집고 다니다 가장 싼 가격을 부르는 숙소에 짐을 풀었다. 정말이지 말도 못하게 더러운 푸세식 화장실에, 세면시설이라고는 마당에 있는 수도꼭지와 대야 하나가 전부였고, 방 안에는 낡고 먼지낀 선풍기가 털털털 거리며 돌아가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8월의 방콕을 나흘간 보냈다. (그리고 말라리아에 걸렸다..! 스물 갓 넘은 나이에 이렇게 생을 마감하는구나 싶어서 얼마나 무서웠던지. 다행히 한국에 돌아온 뒤 증상이 나타나, 약으로 금방 치료가 되었다.)
그 때 방콕에서 특별히 무엇을 한 것도 아니고, 어딜 간 것도 아니고(아는 게 있어야 어딜 가든가 말든가), 그냥 카오산로드에만 어슬렁거렸다. 길가의 작은 카페에 죽치고 앉아 주인이랑 시시껄렁 농담따먹기 하고, 배가 출출하면 노점의 빛바랜 플라스틱 의자에 엉덩이를 척 걸치고 앉아 30밧(우리 돈으로 천 원) 하는 볶음쌀국수를 먹고(이게 또 환장하게 맛있다ㅠ), 색색이 탐스런 열대과일들은 보기만 해도 얼마나 행복해지던지! 과일 장수들은 망고와 파파야, 코코넛 등 무엇이든 척척 갈아 컵 대신 비닐봉다리에 쭈르륵 담아주었다. 그 비닐봉지 주스를 빨대로 쪽쪽 빨아먹으며 길가의 책방이나 온갖 희한한 물건들을 파는 좌판, 각종 리어카 행상들을 기웃거렸다. 저녁에는 펍에 앉아 옆자리에 앉은 여행자와 세상 진지한 인생토크를 나누기도 하고, 밤이 깊으면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와 온 몸을 땀으로 적셔가며 잠을 잤다. 카오산에는 무언가 히피스러움이 있었고, 그러한 분위기가 여행의 초짜와 고수를 가르지 않고 다 품어주었다. 무엇이든 다 있지만, 여행을 방해하는 그 무엇은 없던 곳이었다.
그때의 기억이 너무도 좋아서, 나는 이후로 틈만 나면 방콕행을 노렸다. 처음 들어간 직장의 휴가는 태국의 섬에서 보냈고, 장기여행을 갈 때마다 방콕을 경유해서 갔다. 그렇게 카오산로드는, 내 여행이 시작되거나 끝나는 곳이 되어갔다. 그리고 마지막 장기여행을 했던 2007년 이후로 카오산을 가지 못했다. 다섯 번의 카오산, 그리고 10년이 지났다.
태봉은 비행기에서 내리자 몸이 춥다며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셨고, 나는 인터넷을 사용하기 위해 유심칩을 샀다. 출국하는 날 아침에야 짐을 꾸린 부부에게, 숙소 위치 같은 걸 미리 챙길 정신이 있었을 리 없다. 10년 전이라면 더없이 난감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공항에 있는 통신사 부스를 찾아가면 되었다. 태국에서 일주일간 1.5G의 데이터를 사용할 수 있는 유심칩을 단돈 만 원이면 살 수 있었다. 칩을 갈아 끼우자마자 구글맵으로 우리가 가야할 숙소와 경로를 검색했다. (순식간에 튀어나오는 온갖 정보에 겉으로는 자연스러운 듯 했지만, 속으로는 세상에! 헐! 이런 격세지감이란!! 나는 이제 더이상 미아가 되지 않는 것인가!) 심지어 공항에서 카오산 가는 택시 가격을 검색하다가, 카오산 전용 셔틀버스가 생겼다는 고무적인 사실도 알게 됐다. 셔틀버스는 표를 2장 사야하니까 택시비와 크게 차이는 없을 것 같았지만, 괜히 돈을 더 쓸 필요는 없으니까 셔틀로 결정. 역시 똑똑한 결정이었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방콕의 도로는 꽉꽉 막혔다.
숙소는 무조건 카오산과 가까운 곳이어야 했다. 카오산까지 걸어서 20분이면 갈 수 있는 호텔에 2박 예약을 했다. 한국에서 부킹닷컴으로 예약을 하며, 우리 허니문이예요, 라고 메시지를 보내놓았다. 혹시 뭐라도 주지 않을까 내심 기대해봤는데, 역시 1박에 5만원짜리 호텔에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 심지어 방도 너무 단순해서 조금 실망했다. 16년전 공포의 게스트하우스를 생각하면 이건 그야말로 초특급 럭셔리 호텔인 셈이라, 내가 잠깐 물가를 잊고 있었어.
태국에서의 첫 끼니는 똠양꿍으로 정했다. 자나깨나 고대하던 태국 음식들이 많지만 그중의 으뜸은 팟타이와 똠양꿍이 아니겠는가. 태국에 온 이상 팟타이야 피할래야 피할 수가 없을 테고, 뭔가 첫 날의 식사를 기념하기엔 똠양꿍이 제격이다. 호텔 리셉션에 내려가 똠양꿍 맛있는 집을 추천해달라고 부탁했다. 우리가 영어로 물었는데, 직원이 무려 한국어로 대답해줬다.
"아아 똠양꿍이요?"
그녀는 단숨에 지도를 꺼내더니, 지도의 한쪽 귀퉁이에 별표를 쓱쓱 그려넣었다.
"카오산로드에 있어요. 여기로 가면 되요."
"이름이 뭐예요?"
"똠얌꿍이요"
"가게 이름이 뭐냐고요??"
"똠얌꿍이요."
"아..!"
똠얌꿍 맛집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지도를 품에 안고 걷기 시작했다. 얼마를 걷자, 딱 봐도 카오산 같은 골목이 나왔다. 바로 전 골목과 분위기가 확 달라지는 북적북적한 느낌. 나는 골목 이름을 확인할 것도 없이 "봐봐- 그냥 딱 봐도 카오산 느낌이 오지?" 이러며 태봉을 이끌고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골목 끝까지 다 가도록 음식점이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그곳이 카오산이 아닐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태봉이 의심을 품고 골목 이름을 찾아보니, 듣도보도 못한 Rambutri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한 블럭을 더 내려가니, 좀전보다 훨씬 더 번잡하고 시끄럽고 호화롭고 퇴폐적인 느낌의 거리가 나왔다. 이곳이 카오산이었다. 정신이 멍해졌다.
똠얌꿍은 맛있게 먹었지만, 생각보다 많이 비쌌다. 레스토랑은 고급스러웠고, 직원들은 세심하게 손님의 동작 하나하나를 살폈다. 하지만 내가 먹고 싶은 똠양꿍은 이런 게 아니었다. 레스토랑에서 나와 길을 걸었다. 백 명은 동시에 수용 가능할 듯한 마사지샵, 맥도날드와 스타벅스와 KFC, 거대한 간판들, 쾅쾅 울려대는 술집 음악과 호객꾼들. 이건 또 왠 듣도보도 못한 이상한 거리인가. 노점상 간이 테이블과 봉다리주스와 과일리어카는 다 어디로 갔나. 나는 지금 어디에 있나.
'아니야.. 내가 보여주고 싶던 카오산은 이런 곳이 아니었단 말야...'
돈이 아무리 적은 여행자도 행복할 수 있던, 배낭여행자들의 베이스캠프. 전세계 여행자들이 다 모여들지만, 희한하게 조용하고 심심했던 동네. 내가 알고 있던 카오산을 태봉에게 보여주고, 이곳에 스며있는 내 추억을 나누고 싶었는데.. 이젠 글러버렸다. 태국도, 방콕도 아닌, 카오산 그 자체로 존재하던 길은 증발해버렸다. 10년전 스타벅스가 처음 카오산에 생길 무렵, 여행자들은 "세상에, 카오산에 프랜차이즈가 들어선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탄식했었다. 그게 내가 마지막으로 카오산에 갔을 무렵이었다. 그리고 10년이 지나, 이젠 제정신으로는 몇 십미터도 걷기 힘들만큼 난잡한 거리가 되어있었다. 어쩔 텐가. 이미 수많은 곳이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럴 때마다 마음이 착잡해지지만, 한 편으로 이런 생각도 든다.
아, 이곳이 원래 참 매력 넘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는 걸 알고 있어 다행이다. 남들보다 조금 일찍 왔던 덕에 이곳의 반짝임을 누렸구나. 아쉽고 쓸쓸하지만, 이 추억이 내게 있어 감사하다. 만약 어느 누군가 "아 카오산 완전 XX였어. 가지 마 가지 마."라고 말한다면, 이곳이 사실은 얼마나 쩌는 매력을 지닌 곳이었는지 한 마디 변호는 해줘야지.
라는 생각 말이다.
더불어, 모든 것이 변해버리기 전에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야겠구나 생각해보는 도리밖에.
그리고 나는, 다시 카오산로드를 찾지 않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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