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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은초 Mar 21. 2016

치앙마이, 네가 좋아

허니문을 가장한 하드코어 배낭여행(4)

태국 북부 산악 지대로


Walk on the wild side


방콕을 떠나 치앙마이로 떠나는 날. 이제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된다고 생각하니 어서 가고 싶어 애가 탈 지경이었다. 버스는 저녁 8시에 출발해서 다음날 아침 7시에 도착한다고 했다. 꼬박 11시간의 장거리 이동이니 간식을 좀 챙기기로 했다. 나는 배낭에서 네모난 플라스틱 밀폐용기를 꺼내 들며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 이걸 챙겨 온 내가 대단하지 않아?" (=>1회 참고 )

태봉은 차마 아니라고 말은 못 하고 '그건 대체 어따 쓰는 물건인고' 하는 눈빛만 보낼 뿐이었다. 흥, 두고 보아라. 나의 세심함에 감탄하게 될 테니. 나는 아침에 먹고 남은 망고와 잭 프룻을 잘라 플라스틱 용기에 담았다. 여행 내내 이어진 우리의 열대 과일 사랑은 이 플라스틱 통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뚜껑은 과일 깎는 접시로, 통은 과일을 담거나 쟁여놓는 그릇으로 참으로 유용하게 쓰였다. 여행 말미, 태봉은 과연 이번 여행의 잇 아이템으로 플라스틱 통을 꼽았다.


버스 터미널 가는 길. 여행사에서는 숙소로 픽업 차량이 갈 거라고 했는데, 과연 짐칸에 픽업되었다.   


카오산 인근의 구석진 공터에서 치앙마이행 버스가 출발한 건 예정시간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역시 고물버스에 당첨인 건가'라는 불안감이 슬슬 올라올 무렵 버스가 나타났다. 버스는 꽤 괜찮았다. 최근에 심해진 멀미 때문에 걱정했는데 의외로 아무 어려움 없이 숙면할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미리 먹어둔 멀미약에 취해 정신을 잃은 것일지도. 하여간, 11시간 내내 줄기차게 잠만 잤다. 태봉은 자다가 깼다가, 노트북도 했다가, 화장실도 들락날락하는 모양새였으나 나는 간간이 눈을 떴다가 "정말 잘 자네?" 한 마디 듣고는 다시 머리 박고 의식을 잃곤 했다.


그렇게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치앙마이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이 기분 좋았다. 방콕에 세 번째인가 갔을 무렵, 지인들에게서 치앙마이라는 곳이 그렇게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태국 북부로 올라가면 방콕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인데 참 괜찮다고, 치앙마이라는 곳을 한 번 가보라고 했다. 이야기로만 전해 들은 태국 북부는 트레킹과 코끼리, 고산지역의 소수부족, 범접할 수 없는 정글 숲 같은 것들을 연상케 했다. 상상 속에서 나는 어마어마하게 덥고 습한 정글 숲을 마구 헤쳐나갔다. 며칠간 씻지도 못하고.. 옷은 땀에 푹 절고.. 얼굴은 숯검댕이 된 채로.. 내게 태국 북부와 치앙마이는 그렇게 머나먼 원시의 세계로 남아버렸다.

말하자면 이런 상상..... (참고로 이건 1995년 동아일보 기사)



새벽 동이 트고 햇볕이 번질 무렵, 버스가 치앙마이 시내에 들어섰다. 어라???? 시원시원 뚫려있는 도로와 잘 정돈된 길가, 녹색의 우거진 나무들과 길게 이어진 호수가 눈을 사로잡았다. 아침 햇볕에 도시 전체가 반짝거렸다. 나는 감탄을 내뱉으며 창문에 코를 박고 내내 경치를 감상했다. 버스에서 내리니 방콕과는 차원이 다른, 맑고 상쾌한 아침 공기가 마음을 달뜨게 했다.


당장 이 아름다운 도시을 샅샅이 훑어보고 싶었지만, 일단 숙소로 가서 꾀죄죄한 몰골부터 벗고 볼 일이었다. 오늘 예약해 둔 숙소는 치앙마이 구시가지와는 거리가 꽤 떨어져 있는 곳이라, 이동하기 전에 터미널에서 커피 한 잔으로 아침을 시작했다. 쾌청한 기운과 뜨거운 커피 한 잔. 잠이 깨어나는 산뜻한 기분. 이 짧고도 충만한 행복의 시간이라니.  

  

테이블 위로 보이는 플라스틱 통이 바로 그 대견한 녀석. 모닝커피와 하루 묵은 망고로 아침식사를 ㅎ



치앙마이의 완벽한 하루


하루 종일 이 바람소리를 들어도 좋겠어


그래도 허니문인데 리조트에서 워밍업은 하고 본격 여행을 시작하겠다며 치앙마이 숙소를 고르고 있을 때, 다음과 같은 리뷰가 눈에 들어왔다.


  "온 사방이 유리창으로 둘러싸인 2층 침실에서는 너무도 아름다운 남국의 푸른 나무들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어 여기가 정글이 아닌가 착각이 될 정도였습니다. 바람이 잘 통하는 일층에서 책을 읽는 것도 좋고, 마사지를 받는 것도 좋고, 음료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았습니다. 그리고 하루의 마지막은 밤하늘을 쳐다보면서 거품 욕조에서 럭셔리한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더 볼 것도 없었다. 여기로 가자!


중심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바로 그 덕에 고요하게 머물 수 있는 곳이라더니, 과연 택시는 한참을 달렸다. 그리고 리조트는 정말로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샤워가 간절했는데, 짱 친절한 직원들이 아침 8시 댓바람부터 체크인을 허락해준 덕에 긴긴 하루를 차지할 수 있었다. 울창한 나무 사이사이 2층으로 이루어진 방갈로가 독채 형식으로 있는 구조였다. 아래층은 낮잠을 자거나 쉴 수 있는 마루 공간이고, 2층이 숙소였다. 전통적인 태국 스타일로 지어진 숙소 내부는 사방으로 창문이 나 있어서 솔솔 들어오는 바람소리가 말할 수 없이 좋았다.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바람 소리를 들어도 좋을 것 같았다.

하루종일 이 바람소리를 들어도 좋겠어

오전은 사각사각 바람 소리를 들으며, 오후는 수영장이 있는 정원에서 책과 신문을 보며 보냈다. 저녁에는 다채로운 핸드메이드 제품들을 구경할 수 있다는 주말 시장에 가보기로 했다. 선데이 마켓이 유명하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리셉션의 직원이 토요일과 일요일 각각 다른 장소에서 주말 시장이 열린다고 알려줬다. 할 일 계획이란 아무것도 없던 우리는 설렁설렁 시장 구경이나 가보기로 했다.


핸드메이드의 천국


시장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흐억, 입이 떡 벌어졌다. 이 굉장한 인파는 무엇인고! 이 어마어마한 규모는 또 무엇인고! 택시에서 내린 딱 그 지점에서부터 발걸음을 뗄 줄 모르는 나를 질질 끌고 태봉은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와 진짜. 와아 이거 진짜!!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아드레날린이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입구 첫 점포에서부터 딱 내 스타일의 바지들이 어쩜 그리도 갖가지 패턴과 색상으로 걸려있는지. 이것도 사고 싶고 저것도 사고 싶고, 아아- 한 열 벌쯤은 쟁이고 싶다!! 마지막까지 두 벌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음... 두 개쯤은 사도 되지 않을까?" 이러는 내게 태봉은 단호하게 지름신을 잘라주더니, 불과 10분 뒤에 자기는 비누조각에 눈이 뒤집혀서 한 일곱 개는 집어 들고 만다.


마침내 선택한 한 벌 ㅎㅎ (하나 더 샀어야 해ㅠ)

바지 하나를 사고 옆 집으로 가자마자 이번엔 또 다른 간지 폭발 바지들이 오열 종대로 늘어서 있다. 아, 이것도 도저히 지나칠 수가 없구나.. 간신히 그 옆집으로 넘어가니, 아니 웬 가죽 가방이 이리도 싼가! 침을 흘리며 구경하다 옆 집에 갔더니 여행자 간지가 철철 넘쳐흐르는 천 가방이 있다. 이 디테일한 바느질 좀 보소! 바느질이 이리 꼼꼼하고 색감도 이리 예쁜데, 3천 원밖에 안 한다고? 나는 행복한 동시에, 이것들을 죄다 싹쓸이하고 싶은 무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이놈의 시장은 어마어마하게 큰데, 뭐 하나 구경을 빠뜨리고 싶지 않을 만큼 눈과 맘을 온통 사로잡았다. 우리는 한참이 지나도록 불과 몇십 미터를 전진하지 못했다. 사람 많은 곳을 몹시 피곤해하는 태봉이나 나로서는 정말이지 흔치 않은 경우다. 물건 구경하는 재미도 재미였지만, 물건을 파는 이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어느 유명 관광지에서나 흔히 볼 수 있듯이, 손님을 붙잡기 위해 소리소리 지르거나 현지 물가에 비해 터무니없는 바가지를 씌우거나, 일단 말도 안 되는 가격을 내뱉고 다음 수순으로 "얼마를 원해", "네가 원하는 가격을 불러봐"와 같은 끈질긴 흥정 게임으로 이어지는.. 이런 피곤한 모습은 치앙마이 시장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자신의 물건에 자부심이 느껴지는 얼굴이었고, 가격도 크게 흥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삶을 즐기는 듯 보였고, 딱 좋을 만큼 친절하고 무관심했다. 골목 입구에서 처음 바지를 살 때는 으레 흥정을 시도했다가 일언지하 거절당하기도 했다. 사실, 흥정하기 미안한 가격이기도 했다. 시장을 돌아다니며 내가 몇 번 소심하게 "좀 깎아볼까?"하면, 태봉이 "아이, 그러지 말자." 이러고. 그럼 나는 또 냉큼 "그치? 너무 싸지?" 이러곤 했으니까.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이렇게 사람 많고 북적이는, 관광객들로 넘쳐나는 시장이 어떻게 이런 매력을 유지하고 있는지. 카오산의 처절한 붕괴(?)를 목도하고 온 우리로서는 미스터리할 만큼. 거 참 희한하다 소리를 반복했을 만큼 말이다.


토요 마켓 시작하는 시간에 왔다가 폐장 시간에야 시장을 나왔다. 시장 구경은 반도 못한 거 같았다. 우리는 오늘의 전리품을 안고 숙소로 귀환하며 행복감에 낄낄거렸다. 내일도 꼭 일요 마켓에 가보자며, 원래 오늘보다 내일 마켓이 더 유명하더라면서. 기대가 하늘만큼 부풀어올랐다.



나의 사랑 너의 사랑, 치앙마이


럭셔리는 이제 끝이야!


다음날은 본격적인 치앙마이 시내 탐방을 위해 구시가지로 숙소를 옮기기로 했다. 방콕에서는 호텔, 어젯밤은 리조트. 이제 몸풀기는 끝났고, 본격적인 게스트하우스 생활이 시작될 것이다. 태봉에게 오늘 잘 곳은 이 리조트의 10분의 1 가격이라고 미리 언질을 해줬다. 오늘 체크아웃 전까지 마지막 럭셔리를 즐기라며 ㅎㅎ

 

그 마지막 의식을 치르기 위해 리조트 안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탱글탱글 신선한 열대과일과, 닭고기와 갖은 야채가 듬뿍 들어간 쌀죽, 빵과 수제 잼도 종류별로 가지가지. 볕이 좋은 창가 자리에서 풍성한 아침 식사를 즐겼다. 그리고 달걀 요리는 따로 주문할 수 있어서, 스크램블드 에그를 주문했다.

아침식사와 함께 즐길 수 있는 풍경

내게 여행 중 가장 소중한 시간을 꼽으라면 ‘느긋한 아침식사 시간'을 들겠다. 한국에서는 남들이 기겁할 만큼 기상시간이 늦은 탓에 아침밥을 건너뛰고 산 지 오래다. 회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기상한다 해도, 잠을 떨치기도 버거운 와중에 밥이 웬 말인가. 하지만 여행지에서라면 상황이 달라진다. 급할 것 없는 느지막한 아침, 그렇다고 아침을 먹기에 너무 민망하지는 않은 시간쯤 눈을 뜬다. 몸은 여전히 침대에 뉘인 채- 오늘의 아침식사를 궁리한다. 아침식사가 포함되어 있는 숙소라면 부스스한 채로 일어나 세상 편안한 아침을 먹을 수 있는 장점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숙소 인근의 분위기 좋은 카페나 음식점에서 조식 메뉴를 골라보는 재미가 있다. 주로 토스트, 베이컨, 달걀, 커피 등으로 차려진 아침밥을 먹으며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까 궁리하고, 가이드북을 펼쳐보며 가볼만한 곳들을 계획하고, 피를 돌게 하는 카페인의 힘으로 정신을 깨우기도 한다. 아침 식사야말로 여행의 하루를 여는 공식적인 의식인 셈이다.


이렇게 중요한 아침식사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메뉴는 달걀 요리이다. 오믈렛, 스크램블드 에그, 프라이 각각의 매력이 있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흰자는 바싹 익히고 노른자는 동글동글 솟아오른 반숙 프라이. 노른자가 터져 있어서는 절대 안 된다. 톡-하고 깨뜨린 노른자에 빵을 찍어먹는 즐거임이란-! 모르겠거든 일단 잡솨봐! 빵과의 콜라보 대신 달걀 자체를 먹고 싶을 때는 스크램블을 선호하고, 좀 더 포만감 있는 식사를 원할 때는 오믈렛을 주문한다. 오늘의 선택은 스크램블!


체크아웃할 때, 숙소에서 선물이라며 수제 잼을 무려 두 병이나 주었다. 딸기잼과 열대과일잼. 하필이면 이 무거운 잼이라니! 난색을 표했지만, 이후로 토스트와 싸구려 잼 혹은 잼조차도 따로 돈을 내야 하는 간소한 아침 식사를 할 때마다 이 고급진 잼들은 그야말로 꿀템이 되었다.


치앙마이에는 도둑이 없어요


'카사'라는 이름의 게스트하우스로 옮겼다. 자그마한 레스토랑을 겸하고 있는 곳으로, 레스토랑 안쪽에 있는 나무 계단을 올라가면 다락방 같은 2층 공간에 아주 작고 단출한 방 세 개가 나란히 붙어있었다. 단순히 멋을 위해 진열된 인테리어 장식이나 소품은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극강의 심플함을 보이는 방이었다. 침대 하나, 옷장 하나로 끝이었다. 그래도 침대에 서랍이 달려있고, 그 위로 큰 창이 붙어있어 바람이 살랑살랑 들어왔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방문에 붙어있는 경고장. "두리안 테러범은 벌금 2천밧"

점심을 먹으러 숙소 주인 알베르또에게 근처에 맛있는 채식 레스토랑이 있는지 물었다. 태봉은 8년째 베지테리언이다(이었으나, 치킨 킬러인 나를 만나고 한 달만에 닭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다른 고기는 안 먹는 것으로 근근이 명색을 이어가는 중). 마침 치앙마이가 채식을 하기 더없이 좋은 곳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였다. 아닌 게 아니라, 길거리를 다니다 보면 발에 채이는 게 채식 식당이었다. 치앙마이는 산으로 둘러싸인 지역 특성상 다채로운 유기농 작법이 발달한데다, 높은 수준의 채식 식당이 많다고 했다. 태봉과 함께 제대로 된 채식요리를 한 번 먹어보고 싶었다. 알베르또가 아주 훌륭한 곳이 있다며 두 곳을 추천해줬는데, 일요일이라 두 곳 다 문을 닫았다. 레스토랑 찾는다고 한참을 헤맸더니 한낮부터 아사할 지경이라, 문을 연 곳 아무 데나 들어가서 먹었다. 짱 맛있었다. 치앙마이는 모든 요리가 다 이렇게 맛있나?


밥을 먹었으니 망중한을 사랑하는 베짱이, 카페 죽순이, 카페인 중독자의 욕구를 채울 시간이 왔다. 태국 북부의 산악 지역은 커피 산지로도 유명해서 원두 맛이 기대되기도 했고, 치앙마이만의 독특한 예술적 분위기가 어우러진 카페 거리가 있다 하니 냉큼 가볼 일이었다. 치앙마이에서 가장 트렌디한 곳이자 핫 플레이스라는 님만 해민(Nimman Haemin) 거리. 지도를 확인하니 걸어가기엔 좀 먼 듯해서 택시를 탔다. 맛집 때문이라면 가지 않았겠지만 커피를 위해서라면야! 에스프레소 1일 7샷도 문제없는 나인지라 한 세 군데쯤 둘러보고픈 욕망이 일었지만, 최종 간택된 곳은 라테아트 챔피언쉽 수상으로 유명한 카페. 라테 마니아인 나로서는 그 맛이 궁금해서 일찍부터 찜꽁해둔 곳이었다.

카페는 북적북적했지만, 다행히 야외 테라스에 빈자리가 있어 한낮의 햇살을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 유명한 라테아트도 과연 예뻤지만, 진한 커피에 부드럽고 묵직한 우유 거품의 조화가 내 취향에 딱 맞았다. 이날 오후의 치앙마이는 이곳의 라테와 이 시간의 볕으로 기억날 것이다. 그게, 어쩌면 별 거 없어 보이는, 카페에서의 시간이 갖는 희한한 힘이 아닌가 싶다.


선데이 마켓이 열리는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일어나 걷는데, (그럼 그렇지) 방향을 잘못 잡았나 보다. 지도를 따라 걷는다고 걸었는데, 자꾸 지도와 다르게 생긴 길이 나오는 거다. 점점 어둑어둑해지는 게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러다 젠장, 막다른 길에 도착하고 말았다. 골목 끝에는 오토바이 몇 대가 놓여있고, 이십 대 초반 가량의 남녀 몇 명이서 낄낄거리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들에게 선데이 마켓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그러자 다시 자기들끼리 몇 마디를 주고받더니, 그중 한 여인이 오토바이에 올라 부릉부릉 시동을 켰다. 그러더니 엄지를 치켜들고, 자신의 뒷자리를 가리킨다.

"타요!"

모인 친구들이 까르륵까르륵 웃고, 우리도 덩달아 실실 웃으며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그녀의 이름은 Fah, 님만 해민에 있는 다른 카페에서 일한다고 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고. 걸어가는 길에 진창 헤맬 뻔했던 우리는, 덕분에 신나는 라이딩을 즐기며 마켓이 열리는 입구까지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그녀의 허리춤. 시원한 저녁 바람. 우리를 내려주고 부릉부릉 다시 돌아가던 뒷모습.        

이쁘고 고마운 Fah!


걸어가는 길에, 태봉은 아까 숙소를 나오면서 있었던 일을 얘기해줬다. 갖고 있는 돈뭉치가 걱정된 태봉이 알베르또에게 혹시 귀중품을 보관할 수 있는 금고가 있는지를 물었나 보다. 그랬더니 알베르또가 웃으며 대답하더란다.


"걱정 마. 치앙마이에는 도둑이 없어."


어떤 사람이, 내가 사는 도시에는 도둑이 없다고 강한 자부심을 보이는 건 정말이지 부러운 모습이다. 알베르또에게서 자신이 사는 삶의 터전에 대한 긍지와 애정이 느껴졌다. 태봉은 알베르또의 말에 꽤 강한 인상을 받은 듯했다. 이후 만나는 사람에게마다 치앙마이가 얼마나 괜찮은 도시인지를 말하며, 빼먹지 않고 이 일화를 들려주곤 했다. 치앙마이에는 도둑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이러면서.


그렇잖아도 치앙마이 사람들에게서 특별한 인상을 받았던 우리였는데, 이제 아예 폭풍 애정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여유롭고 평화로운 모습에 더해, 치앙마이에는 다른 곳에 없는 특별한 분위기가 있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친절하다기보다는 뭐랄까, 포용적이었다. 각자의 스타일을 인정하는 포용과 유머러스함이 그들에게 배어있었고, 나는 그 느낌이 무척이나 편안하고 좋았다.


"아, 진짜! 치앙마이 너무 괜찮지 않아?"

"그러니깐. 아우 진짜, 매력 쩔어!"


우리는 주거니 받거니, 치앙마이를 향해 샘솟는 애정을 몇 번이고 쏟아내었다.  



도시 전체를 감싸는 예술의 아우라


오늘 선데이 마켓은 어제보다 더 크다. 종류도 더 다양하고, 심지어 가격마저 더 싸다! 이 넓은 시장을 언제 다 볼 텐가! 한 블록을 보는 데 삼십 분은 족히 걸린 거 같은데, 그 블록 끝에는 앞으로 이어진 길과 오른쪽으로 꺾어진 길과 왼쪽으로 꺾어진 길이 있고, 눈 딱 감고 과감하게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다시 또 이어지는 새로운 골목들.. 아아아!!! 우리는 비명을 내질렀다.


"그래, 일단은 전진하자."

다채로운 핸드메이드 물건들에 혼이 빠져 좀체 앞으로 나가질 못하던 우리는 이렇게 합의를 보았다. 하지만 세 걸음만에 제자리. 정신을 차리고 다시 걸어보지만 또 다섯 걸음만에 제자리. 여행을 가며 그 나라에서 독특한 액세서리를 수집하는 취미를 가진 나로서는 이토록 예쁘고, 이토록 품질 좋고, 이토록 싼 물건들을 그냥 지나치려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가방을 부여잡고, 바지를 부여잡고 거의 신음을 내뱉을 지경이었다. 사고 싶어.. 사고 싶어.. 다 사버리고 싶어어.. 쇼핑에 돌부처 같던 남자, 태봉도 이미 내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의 이런 모습은 또 처음 봤다. 한국에서는 뭐 사고 싶은 거 없냐고, 욕심나는 거 없냐고 물어도 그런 거 없다고 대답하던 남자였다. 그런데 여기서는 점포 하나를 쉽게 지나치지 못하는 모습이라니 ㅎㅎ

우리의 꼴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특급 용단이 필요해 보였다. 나는 태봉에게 제안했다.

"앞으로 저녁 먹기 전까지, 각자 멈춰 설 수 있는 기회를 세 번씩만 가질까?"

"좋아!"

우리는 호기롭게 출발했지만.... 불행히도... 둘 다 10미터를 가지 못하고 그 기회를 모두 소진하고 말았으니... 도저히 전진이 불가능해.... 으어어어ㅠㅠㅠㅠ


"그래, 일단 먹자."

우리는 계획을 변경했다. 배가 고프니까 일단 먹자.

하아- 먹거리는 또 왜 이렇게 많단 말인가!!


이렇게 절제 투혼을 발휘하며 어제오늘 우리가 산 물건들은, 내 것 몽족 바지, 가죽 가방, 팔찌, 머플러, 티셔츠, 마그네틱, 손으로 만든 노트, 엽서, 코코넛 오일, 코코넛 립밤, 온갖 종류의 비누꽃, 끈 주머니, 태봉 꺼 몽족 바지와 독특한 질감의 긴팔 옷..


치앙마이의 주말 마켓은 내가 가본 어느 시장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곳만큼 다채로운 수공예품을 파는 곳을 나는 본 적이 없다. 하나같이 독특하고 저마다의 색감과 손재주가 담겨 있는 물건들이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큰 길가는 물론이고 골목골목 빼곡히 채운 노점과 먹거리들 사이로 몇 시간을 걸어도 지루하지 않았다. 그리고 태봉은 마침내! 한국에서 들고 온 체크무늬 남방과 면바지를 벗어버리고 여행자스러운 복장으로 환골탈태에 성공했다. 본인도 엄청 만족스러운지 계속 옷을 쓸어보고 만져보고, 입이 귀에 걸렸다.   


치앙마이가 이런 곳이었다니. 푹푹 삶는 듯한 방콕과 다르게, 상쾌하고 기분 좋은 공기, 푸른 하늘, 초록빛 가득한 나무, 정돈된 거리, 사람들의 유머와 포용, 최고의 즐거움을 선사해준 토요 마켓과 선데이 마켓, 그리고 무엇보다 도시 전체를 감싸는 이 예술적인 아우라까지. 아, 치앙마이가 이런 곳이었다니..!

세상에 어쩜 좋아 -

아, 이 매력 덩어리를 정말 어쩌면 좋아 -

사랑에 빠져버릴 거 같아.. 아니, 이미 빠져버렸는걸!

다시 오고픈 도시를 넘어, 살아보고픈 도시가 되어버린 곳. 치앙마이. 네가 너무 좋아졌어.  (계속)


치앙마이가 이루어낸, 배태봉의 환골탈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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