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도 힘들다 1
"모두 모이세요. 가족회의를 하겠습니다."
아내와 두 아이를 소집했다. 홍콩으로의 입사가 확정되고 비자 발급이 거의 다 진행된 상황에서, 이제는 아이들에게도 홍콩으로 이사를 가는 것에 대해 설명을 해야 했다. 아이들에게도 큰 변화다.
"아빠가 홍콩에 있는 회사에 취직을 하게 됐어. 이제 우리 가족은 홍콩으로 가게 될 거야."
아빠로서, 왜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앞으로 어떤 일들이 있을지, 아이들에게 어떤 기대를 하는지 등을 얘기했다. 아이들의 나이를 고려해서 내용을 줄인다고 줄였다.
"자, 궁금하게 있는 사람은 질문하세요."
둘째가 번쩍 손을 든다.
"아빠! 그런데 우리 홍콩 왜 가요?"
나는 큰 한숨과 함께 앞으로 쓰러졌고, 아내는 깔깔 거리며 뒤로 자지러졌다.
해외로 삶의 환경이 바뀌는 것이 어른에게만 힘든 것은 아니다. 다 표현하지는 않지만 아이들도 힘들다. 익숙했던 동네, 학교와 어린이집에서 사귄 친구들과 선생님들, 친척을 떠나는 일이다. 우리는 결혼 후 신혼집에서 계속 살았었기에 아이들에게는 그곳이 나고 자란 고향이다. 나이가 어린 둘째는 '외국'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홍콩 입국 시 했던 3주간의 격리 기간 내내 이곳에서는 더 이상 한국어는 통하지 않는다는 말을 어린 아이는 이해를 못 했다.
"아빠, 밖에서도 한국어 통해!"
첫째는 한국에서 한 학기를 마쳤다. 그래서 한국국제학교의 한국어 과정으로 전학이 가능했다. 오전 수업은 한국어고 오후 수업은 영어다. 첫째는 언어 발달이 빨랐다. 말을 정말 빨리 익혔고, 한글도 빨리 뗐다. 영어학원에서 기본적인 파닉스도 어느 정도 배운 상태였다. 하지만 충분하지는 않았기에, 영어 일기 숙제를 참 힘들어했다. 엄마 아빠가 돕기는 했지만, 일기를 쓸 때면 밤늦게까지 엉엉 울면서 숙제를 하곤 했다. 그래도 첫째에게는 제법 이상적인 상황이었다. 한국에서 한글을 완벽히 익힌 상태로 홍콩에 왔고, 한국 국제학교 한국어 과정에서 천천히 영어를 익혔고, 그러고 나서 영국계 국제학교로 옮겼다. 차근차근 점진적으로 영어를 익혔기에 크게 무리 없이 한국어와 영어가 다 잘 되는 상황이다.
외국에 처음 오면 아이들의 영어 때문에 걱정을 하게 된다. 언어가 달리니 학습과 교우관계 모든 분야에서 아이들이 위축될 수 있어서다. 하지만 이곳에서 오래 사신 이민자 분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다르다.
"처음에는 영어를 빨리 익혀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사실 중요한 건 영어가 아니라 한국어예요. 아이들은 빨리 배웁니다. 영어는 자연스럽게 익히게 돼요. 하지만 한국어는 따로 애써서 가르치지 않으면 나중에 한국어 실력이 4~5살에 머무를 수가 있습니다."
외국에서 자랐어도 한국인인 이상, 한국과 아예 관계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면, 한국 기업에 취직하거나 한국과 관련된 일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때 한국어를 못하면 오히려 장애가 된단다. 그래서 한국어로 겨우 소통하는 정도가 아니라 한국 책과 신문을 이해할 수 있는 정도로는 실력을 키워놓아야 한다고 이곳 홍콩에서 오래 이미 오래사신 분께서 조언해 주셨다.
둘째가 참 고생을 많이 했다. 지금 글을 쓰는 아빠로서도 마음이 못내 짠하다. 참 밝고 외향적이고 어디에 가도 사랑을 참 많이 받는 아이다. 한국 국제학교 영어과정은 영국계 과정을 따르기 때문에 만 4세면 Reception 과정 (학년 전 과정)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우리 둘째는 영어의 A 도 배운 적이 없기에 입학을 거부당했다. 어쩔 수 없이 가장 가까운 국제유치원 종일 반에 넣었다. 당시에 나는 회사 적응이 바빴고, 아내는 새 집에서 살 준비를 해야 했기에 4살 아이를 옆에 두고 있기는 어려웠다.
이제 시작되었다. 아침마다 아이가 유치원에 가기 싫다며 운다. 처음 겪어보는 불통과 외로움일 거다. 소통 한마디를 못하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딱 필수 단어만 가르쳐서 보냈다.
"화장실을 가고 싶은 땐 피(Pee)라고 해."
아이들은 순수하다. 사회적 포장을 하지 않는다. 좋으면 좋은 거고 싫으면 싫은 거다. 영어 한마디 못하는 우리 아들은 싫다는 신호를 무수히 받았을 거다. 그래도 참 기특한 것이 울면서도 유치원에 들어는 간다. 이 과정을 먼저 경험하신 어머님들이 처음에 보통 2주는 운다고 귀뜸해 주었다. 아들은 일주만에 울음을 그쳤다. 그렇다고 영어가 갑자기 늘고, 친구가 많아진 것은 아니다.
우리 아파트는 한국국제학교에서 걸어서 5분 거리인 한국인이 많이 사는 아파트다. 총 5동이 있는데, 아파트 입출구가 한 곳으로 되어 있어서 출근 시간에 많이들 마주친다. 아들은 같은 유치원 친구를 보면 앞으로 뛰어가 힘차게 손을 흔들며 Hello를 연발한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그런 우리 아들을 휙 외면한다. 그러면 그 부모가 당황해서 인사를 하도록 한다. 이런 광경을 매일 아침 보게 되는 아빠의 마음은 참 안타깝고, 속상하고 아들이 불쌍하기도 하다. 하지만 어찌하랴. 조금 일찍 오기는 했지만 아들에게도 스스로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가 있다. 스스로 해야 한다. 이런 아들이 혹시라도 기죽을까 봐 아내와 나는 작은 일에도 칭찬하고 응원해 주기에 열심이었다.
애든 어른이든 상관없다. 사람은 절박한 상황에서 발전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들이 영어를 익히기 시작하는데, 누나는 파닉스 학원을 다니며 거의 일 년이 걸렸던 것을, 두 달 만에 떼 버렸다. 그렇다고 소통이 자연스럽게 다 되는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더 필요했다.
영국에 사는 조카가 있는데 비슷한 상황이었다. ABC도 모르고 영국 공립학교에서 고생한 조카. 한번 화상통화를 할 기회가 있어서, 조카에게 배운 영어 좀 해보랬더니 처음 한 말이 이랬다.
"It's not fair!"
우리 아들은 이후 학교에 가서도 친구를 사귀는데 제법 애를 먹었다. 남자아이들은 보통 덩치가 크거나 운동을 잘하면 친구를 쉽게 사귄다. 하지만 아들은 그 둘 다에 해당되지 않는다. (나도 덩치가 작고 운동도 못한다.) 그리고 줄곧 하던 말이 이랬다.
"I have no friends."
딸아이는 점진적인 과정을 거쳐 무난하게 잘 적응을 했다. 아들은 급진적인 상황가운데서 고생을 했지만, 그래도 적응했다. 아이들의 성격을 봤을 때, 딸에게는 점진적인 변화가 더 잘 어울리고, 아들은 급진적인 변화도 이겨낼 수 있는 긍정성이 있다. 부모가 할 가장 중요한 역할은 죽지 않도록 계속 응원하고 힘을 넣어주는 것이다. (코칭의 원리와 같다. 여기에서도 배운다.) 작은 성취도 축하해 주고 조금씩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게 돕는 것이다. 지금 아이들은 영국계 국제학교에 잘 적응해서 다니고 있다. 친구들도 있고 학교도 재미있어한다.
아이들은 결국에는 다 적응한다.
여기에서 나의 적응과정을 돌아보게 된다. 아이들은 다 적응하는데 어른은 왜 적응 못하는 경우도 있고, 시간도 더 오래 걸릴까? 사실 적응은 아이들 보다는 어른들에게 문제가 되는 경우가 더 많다. 아이와 어른이 무엇이 다를까?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을수록, 한 번 두 번 성공을 거듭할수록,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더 커져만 간다. 젊을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나이가 들수록 '못했다'는 소리가 그렇게 듣기 싫다. 아이들은 비어 있다. 비어 있기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나의 과거의 가장 찬란했던 성공에 자를 맞추어 놓고, 나 스스로를 힘들게 했던 그 마음을 좀 비워야겠다.
적응을 잘 해내고 즐겁게 학교생활을 하는 아이들이 장하고 기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