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금자리
살다 보면 뜻하지 않은 인연이 연결될 때가 있다.
홍콩에 온다고 지인들께 인사를 하고 다닐 때, 교회 집사님으로부터 홍콩에 있는 목사님 소개를 받았다. 이름정도 받고, 솔직히는 따로 또 알아보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전 직장 동료를 만났는데, 본인의 동서가 얼마 전 홍콩의 한 한인 교회에서 목회를 한다고 소개 시켜주었다. 익숙한 이름이었다. 확인해 보니 동일인이었다. 이런 연유로 그 목사님과는 홍콩에 오기 전부터 카톡을 몇 번 주고받았다.
3주의 격리 기간 동안 목사님께 도움을 받기도 했다. 4살 아이에게 필요한 식가위와, 푸드판다(배달 앱)으로는 구할 수 없었던 반찬 - 김치, 오이김치, 깍두기 - 등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우리가 체크아웃하는 날, 목사님께서 친히 호텔까지 와 주셨다.
"빨리 내려오세요."
T8 태풍 경보가 있는 상황에서 빨리 내려오라며 재촉한 문자는 목사님께 온 것이다. 체크아웃을 하고, 처음으로 직접 만났지만 여유 있게 인사를 할 상황은 아니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중에 아이들을 데리고 택시 두대에 나뉘어 탔다. 그리고 우리가 머물 임시 아파트로 이동했다. 목사님께서 택시 두대를 잡고, 기사에게 목적지까지 다 알아서 안내를 해주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호텔에서 임시아파트 까지는 약 100달러 정도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였다. 그날은 150달러인가 하는 더 비싼 값을 치렀는데, 통상 T8과 같은 경고가 뜨면 기사들은 더 비싼 값을 받는다. 원칙적으로 T8에서는 택시도 운행을 하면 안 된다. 사고가 날 시에는 100% 기사가 책임을 져야 한다. 그래서 기사들은 위험을 무릅쓰는 대가로 더 비싼 값을 부른다.
2023년 9월 홍콩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진 적이 있다. 홍콩 곳곳에 침수사태가 발생했다. 이날, 공항은 아수라장이 됐다. 홍콩 국제공항에 비행기는 계속 착륙을 했고, 전철과 버스 운행이 중단된 상황에서 공항에 들어온 승객들은 집으로 갈 방법이 없었다. 유일한 탈출은 위험을 무릅쓴 택시를 이용하는 것뿐이었다. 기사들은 승객을 가득 채우고 평상시의 2~3배가 되는 1000달러 이상의 금액을 불렀다고 한다. 그래도 택시스탠드에는 긴 줄이 끊이지 않았단다.
다행히 T8 치고는 비바람이 그다지 세지 않았다. 그렇게 처음으로 홍콩의 젖은 땅을 밟고, 임시아파트에서의 생활이 시작됐다. 회사에서는 최대 3달까지 임시아파트에서 머무를 수 있도록 지원해 주는데, 이 기간 동안 홍콩 ID를 발급받고, 은행 계좌를 열고, 실제로 살 집을 구해야 한다. 임시아파트는 말 그대로 임시다. 짐은 다 컨테이너 창고에 있기에 제대로 사는 것 같지가 않다. 안정감이 없다.
임시아파트를 고를 때 옵션이 많았다. 아이들의 바람으로 2층집을 구했는데, 지금은 두고두고 후회한다. 그 좁은 홍콩 아파트를 2층으로 나누어 놓았으니 위층도 좁고 아래층도 좁고, 연결하는 계단도 좁았다. 가장 어려운 점은 짐을 찾을 때 위층과 아래층을 왔다 갔다 하는 점이었다. 냄비 밥에 김, 계란, 포장 김치등을 먹으며 지내다 보니 하루하루가 안정이 되지 않고 힘들었다. 자연스럽게 맥도널드를 사 먹는 횟수가 늘어났다. 한국에서는 아이들 건강을 위해 패스트푸드를 그렇게 못 먹게 했었는데, 여기에선 어쩔 수 없었다.
여기는 임시 아파트이다 보니, 모든 시설에 아이들을 위한 배려가 있을 리 없었다. 문고리도 가구의 모서리도 다 날카롭다. 그러다가 사고가 터졌다. 그날은 부동산 에이전시에서 집을 보여주기 위해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아파트 입구에서 보기로 했고, 나는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정확히 5분 전, 나는 침대 위에서 양말을 신고 있었고, 둘째 아이가 나에게 뛰어왔다. 방 문 앞에 다다랐을 때 아빠! 하며 폴짝 뛰는데 머리 위로 문의 손잡이에 머리를 세게 받았다. 짧은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고, 이건 보통일이 아니라는 직감이 확 들었다. 곧 아이는 비명을 질렀고 머리에서 피가 물총 줄기처럼 솟아 나왔다. 아이와 나의 거리는 2미터 정도였는데, 손 쓸 겨를이 없었다. 아이를 끌어안고, 흰 러닝셔츠로 아이의 머리를 꼭 눌렀다. 불행 중 다행일까? 부동산 에이전트에게 전화를 했다. 바로 병원으로 가자며 온 가족이 에이전트의 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휴일이었기에 병원들이 다 문을 연 상황은 아니었다. 무조건 가까운 사립병원으로 갔다. (홍콩은 사립병원과 공립병원의 시스템이나 치료비가 매우 다르다.)
다행히 뼈나 뇌에는 이상이 없었다. 단순 열상인데, 꼬메기에도 애매해 의료용 본드를 발라줬다. 상처가 나으면 자연스럽게 본드는 떨어진다고 했다. 정수리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내려온 지점에 잔뜩 발라진 본드. 아들은 그렇게 떡진 머리모양으로 한 달이면 된다던 본드를 근 세 달 가까이 붙이고 다녔다. X-ray 찍고, 본드 바르고, 약 받고 3,500 홍콩달러 정도를 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 돈 50만 원에 가까운 돈이다. 그나마 꿰매지 않아서 덜 나왔다. 홍콩사람들은 운동을 참 열심히 한다. 병원에 한번 가보니, 정말 운동을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불행 중 다행인 점이 하나 더 있다. 홍콩은 한국과 달리 공공 의료보험이 없다. 모두 사보험이다. 이 사고가 난 날이, 회사에서 들어준 의료보험이 승인된 바로 다음날이었다. 다행히 치료비는 모두 환급됐다.
말 나온 김에 아들얘기 조금 더하고 싶다. 이렇게 사고가 나도 아들은 배우는 게 없는 것 같다는 아내의 말이 사실이 된 사건이 또 있었다. 머리 본드 사건이 있고 약 1년 후,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눈 위가 찢어졌다며, 바로 병원에 가야 한다고. 아내에게 아이의 의식여부와 안구가 상했는지 여부를 물었다. 둘 다 해당되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두 번째라 그런지 보다 차분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회사에 사정을 말하고 바로 나왔다. 아내가 한국인 성형외과 전문의가 있는 클리닉을 찾아 치료를 했는데, 이 때는 2만 달러가량이 들었다. 우리 돈 300만 원이다. 아들이 마취주사를 잘 참아준 덕에 전신마취를 안했다. 아이가 못참아서 마취 등이 필요했다면 얼마가 들었을지 상상하기도 싫다. 신기한 점은 아직도 아들이 어디에 부딪혔는지를 모른다. 집 가구와 모서리에는 모두 스펀지를 붙여놓았는데, 어떻게 그걸 다 피해서 부딪히는지...... 아들한테 가끔씩 하는 말이 있다.
"니 얼굴 비싼 얼굴이다.또 머리 깨지고 싶지 않으면 집안에서는 좀 뛰지 마라."
홍콩에 거주하는 외국인 대부분은 월세로 산다. 보통 2년 계약을 하는데, 첫 1년은 의무 체류기간이고, 다음 1년 동안에는 상황에 따라 주인도 세입자도 계약을 파기할 수 있다. 보통 1+1 이라고 불린다. 집값이 높은 홍콩에서 공실은 그대로 손실을 의미한다. 그래서 집주인들에게는 공실을 최소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때문에 대부분의 집 계약과 이사는 한 달 안에 이루어진다. 어디나 그렇지만 이 곳도 집을 구할 때 발품을 많이 팔아야 한다. 직접 보지 않고 어떻게 구하랴. 부동산도 부동산마다 연결되는 집주인 다르기 때문에 여러 부동산을 알아봐야 한다. 그나마 홍콩에서 집을 구할 때 좋은 점은 앱이 잘 되어 있어서 월세는 거의 투명하게 공개되어 있다는 점이다. 얼마나 더 협상을 할 수 있는지는 세입자와 부동산 중개인 재량이다. 계약을 할 때, 첫 달 월세비용과 보증금으로 월세 두 달치를 낸다. 월세가 정말 세다. 이 돈이 그냥 사라지는 돈이라니 참 살기 힘든 곳이 맞긴 하구나 싶다. 하지만 게약 순간에 다른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전세도 억 소리가 나기에 계약 시 사기라도 당하면 손실이 너무 크다. 반면 여기는 혹시 사기를 당해도 재기 못할 정도의 피해는 아니다.
아내와 많이 돌아다녔다. 죽은 바퀴벌레 몇 마리가 보이기는 했지만, 아이들 학교에서 가까운 20년 정도 된 새 아파트의 한 집이 마음에 들었다. (홍콩에서 20년 된 아파트는 새 아파트로 불릴만하다. 보통 한번 지으면 40~50년을 넘게 쓴다.) 당시는 코로나로 많은 사람들이 홍콩에서 나가는 시기였다. 덕분에 세입자들이 협상에서 유리했고, 실제로 많은 할인을 받을 수 있었다. 회사에서 첫 2년 동안은 정착 지원금을 제공해 준다. 월세의 약 50% 정도가 되는데, 정말 큰 도움이 됐다. 그렇게 한 아파트에 계약을 했다. 임시아파트에서는 한 달 만에 나와 버렸다. 처음 구한 보금자리는 바다를 바라보는 50층에 위치한 제법 넓은 집이었다. 한국 국제학교 옆이라 한국인들도 많다. 클럽 하우스에는 갖가지 시설이 있고, 온수 풀이 있는 수영장이 마음에 들었다. 지금은 클럽하우스도 없고, 옆집이 너무나 잘 보이는 40년 된 아파트로 이사를 했지만, 적어도 시작은 바다가 넓게 보이는 홍콩의 경치좋은 아파트였다.
한국에서의 준비부터 3주간의 격리, 그리고 한 달의 임시아파트 생활. 지난 3개월 정도의 시간이 십 년처럼 흘러갔다. 많은 일들, 사건들이 있었다. 돌이켜 보면 볼수록 다 감사하기만 하다.
모든 과정을 겪고 이렇게 살고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