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왔다 - 퇴사
지난 18여 년 간의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주변에서 많이 봐 왔다. 나에게도 곧 그런 일이 생길 것이라고 예상하기도 했었지만, 막상 또 이렇게 현실이 되고 나니, 만감이 교차한다.
11월 14일. 회사의 대규모 조직 변경으로 Asia Region은 통째로 사라졌다. 홍콩에서 홍콩만을 지원하는 부서나 직책 외의 Region을 지원하는 모든 부서는 패키지와 함께 퇴사를 통보받았다.
통보받은 날, 겪은 나의 하루를 적어본다.
아침
오늘 Town Hall을 통해 조직 변경 발표가 있을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부서가 어떻게 될지는 사장단과 인사부 외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태풍 때문에 회사에 출근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젯밤 시간으로 수상한 미팅이 Town Hall 후, 12시에 갑자기 꽂혔다. 제목은 Business update인데 내용이 없다. 매니저와 인사부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하는 미팅이다. 느낌이 왔다. 확인하고 싶어 매니저에게 문자를 보냈다.
"중요한 미팅 같은데, 내가 출근을 해야 할까요?"
"태풍이 있으니 오지 않았도 됩니다."
"10시면 경보가 해제되니 12시 까지는 필요하면 갈 수 있습니다. 갈까요?"
"나도 그 미팅이 뭔지는 몰라요. HR에서 잡은 미팅이니, 안전하다고 생각하면 직접 와도 되고 온라인으로 접속해도 됩니다."
매니저가 모를 수가 없는 미팅인데, 거짓말을 하는 듯하다. 아내에게는 얘기를 했다. 그렇게 될 것 같다고. 아내가 차려준 아침식사는 미안하지만 거절하고, 커피 한잔만 삼켰다. 태풍 때문에 아이들도 학교에 가지 않았다. 딸아이가 갑자기 묻는다.
"아빠도 오늘 회사 안 가?"
"응. 아빠도 태풍 때문에 집에서 근무해."
"그래? 근데 왜 그렇게 슬퍼?" (Why are you so sad?)
아, 표정관리! Sad 가 아니라 Serious라고 정정을 해주고 미팅을 준비했다. 1시간으로 예정된 Town Hall 미팅. 중요한 공지 내용은 10분 만에 끝났다. 몇 가지 질문이 있은 뒤 30분이 채 안되어 미팅이 끝났다. 그리고 12시 인사부, 매니저와의 미팅을 통해 퇴사를 통보받았다.
배신감
HR과 매니저와의 미팅. HR director와는 같이 진행한 업무들도 있었고, 늘 잘 지내왔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줌인데도 무거운 공기와 함께 그녀의 얼굴에서 미안함이 느껴졌다. 담담하게 내 역할이 없어진 이유와 퇴직 패키지를 알려주었다. 매니저에게 덧붙일 말이 있냐고 묻자, 매니저는 당황하며 Town Hall에서 들은 게 다라고만 얘기한다. 지난 3년간 함께 일한 팀장으로서 할 말은 아니다. 사실 다 들어서 알고 있다. 아침에 나에게는 online으로 접속할 것처럼 얘기해 놓고, 자신은 회사에 왔다. 사무실에 있는 것을 나에게 숨기려고 했는지 굳이 개인 미팅룸에 들어갔다가, 내가 HR director에게 알리니, 머쓱하게 미팅룸으로 합류했다. 12시에 다른 리더십 팀들과 점심약속을 잡고, HR에게 미팅시간을 미루자고 제안했던 것도 나는 알고 있었다. 얄팍한 인간! 팀원이 자리가 없어져 퇴사하게 되는데, 점심 약속으로 미팅을 미루려고 하다니. 적어도 존중과 예의는 표해 주기를 바랐는데, 더없이 실망스럽다.
"He is so cheap!"
동료들이 그에 대해서 한 말이다. 나도 공감한다.
진정
막상 발표를 듣고 나니, 오히려 담담해졌다. 발표를 듣기 전에는 많이 불안했고 두통도 생겼었다. 조직 변경이 있으리라는 사실은 한 달도 더 전에 알려졌었다. 시간이 다가올수록, 잠을 잘 못 잤다. 새벽에 계속 깼고, 꿈을 자주 꿨고, 자고 나도 피곤했다. 초반에는 단순히 한국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돌아가는 모양을 보니 퇴사당할 가능성이 가장 높아졌다. 그런 사실을 예상하면서도 왜 그렇게 힘들어했을까? 그건 희망을 가졌었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가장 나쁜 시나리오를 택해야 어떤 상황에서라도 대처할 수 있다고 되뇌면서도, 그래도, 마음 한편에서는 계속 좋은 시나리오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이제 결정이 났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정해진 것은 없지만 만들어 나가면 된다.
외로움
개별미팅으로 진행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몇 명이나 나가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제법 많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그만두어서 그나마 외롭지는 않다. 혼자였다면 정말 더 당황스럽고 힘들었을 것 같다. Regoinal office 전체가 없어진 것이니, 어찌하겠는가?
위로
내 뒷자리에 않는 한 동료에게서 문자가 왔다. 입사한 지 채 1년도 안 됐고, Global 조직에서 일하는 remote postion 이기에 당연히 이번 조직 변경에는 포함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자가 왔다.
"I was so naive. Overly positive. I'm shocked, I'm also impacted "
이런... 나도 충격을 받았다. 통화를 했다. 이전 회사에서 비슷한 일을 겪고 우리 회사에 왔는데, 2 연타를 맞아버렸다. 미팅 인비테이션을 받았는데, 미팅을 하기 전에 퇴사 문서가 와버렸단다. 의사결정은 리더들이 하고, 책임은 직원들이 진다. 며칠 전 나에게, 혹 나쁜 일이 생기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말고, 힘내라고 조언해 주었던 친군데, 지금 너무나 크게 당황했다. 그 친구는 글로벌 포지션이라 막상 홍콩 오피스에는 팀 동료도 누구도 마음을 나눌 사람이 한 명도 없다.
"I will be your friend. Let's go through it together. take care, have a healthy food, have a good rest, and see you on next Mon. Let's start with CV!"
난 오늘 종일 위로를 받을 줄만 알았다. 그런데 위로를 하고 있네. 그 동료는 입사 첫날부터 친구가 되어준 나에게 거듭 고마움을 표했다. 힘들 때에는 동료가 필요하다.
감사
한국에서 연락이 왔다. 너무 안타깝다고 미안해하는 동료. 진심으로 많은 공감과 위로, 응원을 해 주었다. 그리고 나와 가장 가깝게 일했던 한국의 J상무님. 이런 사실을 너무 늦게 알게 되어 아무 대처를 못했다면, 미안하다고 말한다. 한국 사장님께 한번 얘기해 보겠다고 하신다. 빈말을 하는 분은 절대 아니시라서 얘기는 해 보시겠지만, 지금 회사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지금 한국 business 사정도 좋지 않다. 그래도 그 진심 어린 말이 정말 고맙다. 정말 마음 깊이 고맙다.
홍콩의 동료에게서 연락이 왔다.
"Are you OK?"
"I just got the letter."
“Oh.. sorry... Fight for your self! Try to negotiate as far as you can!”
그리고 이런저런 팁을 준다. 한 푼이라도 더 받아낼 수 있는 항목들을 알려준다. 될지 안될지는 두고 봐야 하지만, 나 역시 잊고 있었던 것들을 알려주어서 고마웠다.
싱가포르에 있는 동료에게서도 연락이 왔다. 내 이력서를 보내달라며, 바로 자기가 아는 헤드헌터들에게 전달해 주겠다고 한다. 또 가장 가까이서 일했던 대만의 동료는 나에게 평생 연락하고 지내자며 정말 아쉬워했다. 미국의 동료에게서도 연락이 왔다. 나의 전임자. 너무나 놀라고 너무나 많은 안타까움을 표해주었다. 어떤 도움이라도 필요하면 제공해 주겠다는 따뜻한 말에 역시 감사했다.
홍콩에서 살며, 제법 외로움을 많이 느꼈었는데, 그래도 헛살지는 않은 것 같다. 이렇게 많은 위로와 응원에 많이 감사했다.
강심장 아내
아내에게는 늘 고맙다. 나랑 결혼하면, 절대로 고생 안 시키겠다고 약속했는데...... 훨씬 더 좋은 조건의 남자들을 다 뒤로하고 나랑 결혼했는데, 당분간은 좀 고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빚진 마음이고 미안하다.
벌써 오래전부터 아내에게 얘기는 해 놓았다. 언제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더라도 놀라지 말라고. 그래도 일터를 옮기는 거지 실직자가 될 가능성은 적을 거라고 했다. 그런데, 실직자가 되어 버렸다. 이런……
아내는 생각보다 담담하다. 아내는 항상 말해왔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사는 거지 뭐. 자기가 어떤 일이라도 하지, 놀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아내가 걱정을 하거나 불안해했다면 나도 덩달아 더 많이 불안해했을 거다. 아내는 나보다 더 덤덤하다.
홍콩은 섬이다. 바다가 많다.
“자기야, 내가 갑자기 바다에 뛰어들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는 마.”
“자기는 그럴 사람 아니니까 걱정 안 해”
혹, 내가 너무 힘들어할까 봐 많이 살펴주는 아내에게 정말 고맙다. 아내를 보니 다시 열심히 구직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남편이 그렇겠지만 아내를 정말 사랑한다. 다시 열심히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하다가 실패는 할지언정, 다시 노력하는 데까지는 노력해 봐야겠다. 나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보다.
하루의 마무리
어차피 끝이 있을 자리였다. 우리 업계에서는 Region에 있는 경우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지난 3년을 돌이켜 본다. 너무나 힘들었던 적응기, 홍콩이라는 곳에 익숙해져 갔던 정착기, 그리고 정체인가 싶을 때에 마무리를 짓게 되었다. 나와 아내에게도 좋은 시간이었고, 아이들도 국제학교를 경험해 보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 무엇보다 가장 좋았던 것은, 가족이 똘똘 뭉쳐 지냈던 시간이다. 홍콩으로 오지 않았었다면, 둘째는 하루 10시간씩은 어린이 집에 있을 운명이었다. 홍콩에 온 덕분에 엄마의 돌봄을 더 받을 수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바로바로 머리가 돌아갔다. 하지만 의지적으로 생각을 멈췄다. 지난 18여 년 동안 6개의 회사를 다녔다. 이직을 할 때마다 금요일 퇴사 월요일 입사를 반복했다. 한두 번은 안식월을 가졌었도 충분했을 기간인데, 달리기만 했다. 많이는 아니지만 약간의 시간을 가져보려고 한다. 일단 이번 주말은 그냥 쉬자. 아무 생각 없이 쉬자. 아내와 대화를 더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