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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소영 Oct 04. 2021

서른아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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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서울시 공무원 합격자 명단에서 나의 수험번호를 확인하는 순간,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나도 모르게 몇번이나 주님을 불렀는지 모른다. '주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2017년에 평생 직장이라 여기던 일터를 잃어버리고 이후 수년동안 각종 아르바이트와 몇몇 콜센터를 철새처럼 전전하면서 방황했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것일까? 20,30대 나름대로 참 열심히도 살아왔는데 왜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채 나의 청춘은 시들어가는 것일까?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더라도 내 밥벌이는 내가 책임질 수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코 앞에 들이닥친 마흔이 나를 짓눌렀다. 나의 노후는 도대체 어떻게 대비하나..꼬리에 꼬리를 무는 고민들이 나를 잠식시켰고 잠을 설치는 날들이 많아졌다. 좀처럼 그려지지 않는 나의 미래가 두려웠다. 그보다 더욱 절망적인 것은 나는 이미 세상을 다 산 사람처럼 굴었다는 것이다. 겨우 30대 후반일 뿐인데  더 이상 반짝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날들이 모두 지나갔으니 내 남은 인생은 하향선일 뿐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나는 말한다. 무언가를 도전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는 없다고.

 


서른아홉. 막다른 골목길에서 나는 기적처럼 마법의 문을 열었다. 막다른 골목길에 주저앉아 울고 있을 때, 너라면 스스로 문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용기를 북돋아 준 것은 가족이었다. 현직 공무원으로 재직중인 오빠가 끊임없이 나에게 공무원 시험 보기를 권유했고 온 가족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다. 그들은 나조차 잊고 있었던 내 안의 잠재력을 일깨워주고 매일같이 내가 얼마나 가치있는 사람인지를 이야기 해주었다. 실패가 두려워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는 나에게 엄마는 말씀하셨다.

설령 꿈을 이루지 못한다 하더라도 꿈을 위해 노력하는 그 과정들이 결국 너에게 이롭게 될 것이야.
잃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 말이 나를 움직였다. '그래, 해보자.'

더 나이가 들어서 그때 왜 시도하지 못했을까 후회하는 것 보다는 백배 나았다.

 


그렇게 나의 일년여의 수험생활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하루에 한두시간을 책상앞에 앉아서 강의를 듣는 것도 궁둥이에 좀이 쑤셨다. 선생님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건지 알아들을 수 없어 머리털을 쥐어뜯기도 했다. 행정법, 행정학을 공부할 때는 두꺼운 수험서를 북북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아내느라 책을 부여잡고 닭똥같은 눈물만 뚝뚝 흘리곤 했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올때마다 나는 딱 하루씩만 견디기로 했다. 앞으로 소화해야 할 공부량을 헤아리면 토악질이 날 거 같았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만 생각하는 것이 약이었다.

시간은 한달두달 흘러갔다. 아니,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차곡차곡 쌓여갔다는 말이 더 옳은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하루에 한두시간 앉아있는 것도 고역이던 내가 어느덧 하루에 8시간~10시간을 공부하는 것이 당연하게 되었다. 나는 새벽 4시 30분에 기상하는 것을 좋아했다. 한 겨울, 창문 틈 사이로 차가운 공기가 스며드는 시간. 모두가 잠들어있는 그 특유의 고요함을 사랑했다. 졸음이 덜 깬 눈으로도 무의식적으로 일어나서 포근한 양털조끼를 걸치고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는 것이 루틴이었다. 공부를 시작하기 전, 30분동안 생활성가를 들으면서 확언일기를 썼다. 동기부여가 되는 글귀들을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필사하다보면 정신도 맑아지고 마음도 정돈이 되었다. 인터넷에서 공시생 한 명이 올린 글귀가 특히 마음에 들어 며칠동안 같은 문구를 반복해서 썼던 기억이 있다.

좌절을 이기는 방법은 그냥 계속해 나가는 것 뿐이다. 그러다보면 또 달려나가고 싶은 날이 올거라 믿고 그 믿음은 매일 같은 일을 같은 시간에 반복하는 나의 작은 세계에서만 구할 수 있다. 어느날 갑자기 하루 아침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일은 없다. 모든 결과는 과거를 쌓아왔기 때문. 다만 그 축척들이 어느 임계점을 넘었을 때 폭발적인 성장이 나타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눈에 거의 보이지 않고 지루하고 큰 변화없는 매일을 갈고 닦아야만 원하던 미래의 나를 만날 수 있다.

그날그날 해야 하는 일을 완수하는 것. 스스로의 약속을 지키는 날이 많아지자 나는 다시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엄마의 말이 맞았다.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이미 나는 치유되고 있었다. 인내심이 길러졌고 열정이 생겼다. 내 안의 젊음이 살아났다. 인생은 한 치 앞을 모른다. 합격수기를 쓰면서 인생의 달콤함에 취해있는 지금의 나도 한 순간일 뿐이다. 발령을 받고 공직생활을 하다보면 또 다른 어려움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공무원이라는 신분이 내 인생의 모든 고난과 숙제를 해결해주는 만능키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앞으로 내게 어떤 일들이 펼쳐질까. 알 수 없지만, 수험생활을 통해 나는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 배우게 되었다.


비록 나이가 들어 외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변화하게 되더라도 마음은 늙지 말자. 세월의 힘에 저당잡혀 눈 뜬 시체처럼 살지는 않겠다. 마지막 숨을 쉬는 날까지, 내게 주어진 생명력을 다하는 것이 내게 귀한 삶을 허락하신 신께 보답하는 길이며 나의 인생을 사랑하는 방법이다. 이것이 내가 다가오는 40대를 기대하는 이유이다. 삶을 더욱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는 힘껏 끌어안으리라. 운명과 숙명의 이중주 속에서 천명을 헤아릴 줄 알고 와인이 익어가듯 나의 영혼이 세월이 흐를수록 깊어가기를. 그리하여 말 한마디에도, 표정과 몸짓 하나에도 나만의 그윽한 향기가 주변 모든 이들에게 따스히 스며들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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