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위를 찾아가는 아스날에게서 느껴지는 벵거볼의 향기

12년 차 구너의 행복한 21-22 시즌

by Zorba

해버지 박지성 선수의 영향으로 꽤나 오래전부터 해외축구를 봐왔던 것 같다. 그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에게 금발의 토레스와 제라드의 킥은 신선한 충격이었고, 당시 많은 친구들이 그래 왔듯 나도 슬라이드 핸드폰까지 그들의 사진으로 바꿔가며 축구에 대한 열정을 드러냈다. 자연스레 해외축구에 관심이 생기면서 매 주말마다 다양한 팀들의 축구를 보곤 했었는데, 정확히 기억하지 않지만 파브레가스, 나스리, 로시츠키, 반 페르시가 보여주는 아름다운 축구에 넋이 나가 그때부터 아스날 팬(구너)이 되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던 선수들이 하나둘씩 팀을 떠났고 난 그들이 떠남으로써 팀에 대한 애정이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윌셔나 램지와 같은 벵거의 아이들이 팀에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하면서 내가 좋아하던 벵거볼이 유지될 수 있었다. 시즌이 진행됨에 따라 외질, 카솔라, 산체스와 같은 선수들이 합류하면서 내가 좋아하던 스타일의 아스날식 축구가 만개하기 시작했고 그 당시 한 번도 빠짐없이 경기를 챙겨보았다. 03-04 시즌 무패우승을 두 눈으로 보지 못한 나로서는, 이때가 가장 재밌게 축구를 봐왔던 시기였다. 5분만이라도 그라운드에서 아름다운 축구를 구사하고자 하는 벵거의 철학은 나에게 우승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우승은커녕 매번 리그 4위-챔피언스리그 16강이라는 초라한 성적으로 매번 학교에서 놀림감이 되기 일쑤였던 4스날이었지만, 나에게 있어서 아스날 선수들이 보여주는 90분간의 아름다운 벵거볼은 잠시나마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휴식처이자 행복이었다.


동화 같던 레스터시티의 15-16 시즌 리그 우승 뒤에는, 2위 아스날의 아쉬움이 있었다. 10여 년 만에 우승을 할 수 있는 최적의 시즌이었음에도 스스로 그 기회를 걷어찼고, 그 이후부터 아스날의 침체기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이후 항상 유지해왔던 4위의 자리를 지키기 버거웠고, 팬들은 '벵거 아웃'을 외치기 시작했다. 본인만의 확고한 축구 철학으로 지금의 아스날을 만든 아르센 벵거 감독은 22년 만에 쓸쓸한 퇴장을 했고, 그럼에도 끝까지 벵거를 지지했던 나는 그 시점부터 아스날에 대한 열정이 사라져 버렸다. 최근 왓챠에서 아르센 벵거 감독의 다큐멘터리 'Invincible'을 봤는데, 이 말이 참 슬프게 들렸다. "하이버리는 내 영혼이고, 에미레이츠는 내 상처다. 내 결정적인 단점은 아스날을 너무 사랑했다는 것이다." 영광의 시절을 뒤로하고 새로운 경기장을 짓는데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느라 핵심 선수들을 팔면서도, 유스 출신 선수들을 기용하고 저렴한 가격에 필요한 포지션만 보강하며 10년간 4위를 유지한 벵거 감독은 수많은 빅클럽의 제안을 뒤로한 채 아스날에 끝까지 남았다. 만약 그 시기에 벵거마저 없었다면 더 큰 암흑기가 찾아오지 않았을까 싶다. 아스날 팬으로서 벵거는 항상 고맙고 미안한 존재이다. 그가 없었다면 아스날은 없었을 것이고, 나는 지금처럼 축구를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출처 : Football Tribe


벵거가 떠난 후, 아스날은 무색무취의 팀이 되어갔다. 아스날의 경기를 봐도 이전만큼 즐겁지 않았고 자연스레 나는 이 팀에게서 멀어져 갔다. 그러던 중, 전 아스날 선수였고 펩에게서 지도를 받은 미켈 아르테타 감독이 아스날에 선임되었다. 확실히 아스날 DNA도 가지고 있고, 빌드업을 굉장히 중요시 여길 것 같았기에 이 어린 감독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지난 3년간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지금 아르테타는 스스로 증명하며 나로 하여금 벵거볼을 추억할 수 있을만한 엄청난 축구를 하고 있다.


현재의 아스날은 평균 연령이 20대 초반으로 팀 자체가 굉장히 젊다. 우선적으로 헤일 엔드 (아스날 유스 출신)의 부카요 사카와 에밀 스미스 로우가 2선에서 해주는 활약이 너무도 반갑다. 팀이 침체기일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잘 자라준 유스의 힘이 너무나도 중요한데, 아스날의 현재 공격포인트 1, 2위를 기록 중인 이 두 선수의 힘이 팀을 살아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거기에 이번 시즌 레알 마드리드로부터 영입된 외데고르는 내가 아스날에서 가장 좋아했던 외질을 떠올리게 해 줄 만큼 충분한 창의력을 경기장 내에서 불어넣고 있다. 거기에 더불어 이 선수는 외질의 단점으로 꼽혔던 압박과 수비력까지 선보이며 어떨 때는 팀에 헌신적인 램지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거기에 추가적으로 가브리엘 마르티넬리의 뒷공간 침투까지 살아나며 확실히 공격 전개가 매끄럽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이들이 마음 놓고 플레이를 펼칠 수 있는 데는 최근 폼이 살아난 토마스 파티의 역할이 그 누구보다 크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스날 경기를 보기 시작한 이후부터 원볼란치에서 이렇게 든든하게 중원 싸움에서 안정감 있게 탈압박하며 볼을 지켜주고 쟁취해주는 선수가 있었나 싶을 정도이다. 횡패스와 백패스만 하지 않고 전진성 있는 패스를 지속적으로 넣어주며 가끔 공격 상황에서도 번뜩이는 모습을 보여주는 파티가 핵심적인 역할을 해주고 있다.


이번 시즌 가장 큰 변화라면 수비라인이 아닐까 싶다. 왼쪽 라인의 마갈량이스와 티어니는 이전 시즌부터 좋은 모습을 보여줬더라도, 새로 영입된 골키퍼 램스데일, 오른쪽 센터백 벤 화이트, 오른쪽 풀백 토미야스가 이렇게 수비에 안정감을 가져올 줄을 상상도 못 했다. 우선 램스데일의 선방 능력을 둘째 치더라도, 빌드업 능력이 너무 탁월하다. 가끔 보여주는 밑으로 낮게 깔리는 패스와 롱킥은 맨시티의 에메르송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이 선수만의 특별한 장점이라 하면 파이팅 넘치는 모습이다. 선방하거나 좋은 수비 상황이 나왔을 때 카메라에 비치는 램스데일의 모습을 보면 수비라인을 모두 하나로 만들어주고 있다. 벤 화이트는 맨시티의 후벵 디아스, 리버풀의 반 다이크처럼 아스날에서 상징적인 수비수가 되어가고 있다. 빌드업 능력이 탁월한 이 수비수는 본인의 발기술에 자신이 있어 보인다. 수비를 최대한 본인에게 끌어당기고 패스를 주는 모습이 종종 보이고, 공간이 있으면 본인이 직접 상대 진영까지 볼을 운반하기도 한다. 기본적인 수비 지능이 뛰어나고 약점으로 꼽혔던 공중볼 처리에서도 최근에는 굉장히 안정감을 찾았다. 티어니가 왼쪽에서 높이 전진해서 공격에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면, 토미야스는 뒤에서 든든하게 수비에 도움을 준다. 항상 약점으로 꼽혔던 아스날의 우풀백에 헌신적인 토미야스의 활약은 매번 감사할 따름이다. 최근 토미야스의 길어진 부상으로 우려가 있었지만 그 공백을 세드릭 소아레스가 잘 메꿔주면서 아스날은 점점 완성도 있는 팀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무엇보다 어제 아스톤빌라와의 경기를 보면서 아스날은 '원팀'이 되었다고 확신했다. 골을 넣을 때마다 모든 선수들이 함께 셀레브레이션을 하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팬으로서 그보다 기쁠 수 없다. 한 선수가 상대방의 거친 플레이로 부상을 당할뻔할 때, 모든 선수가 달려와서 그 선수를 보호하고 심판에게 같이 싸워주며 항의하는 모습을 보면 팀이 하나로 뭉쳐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최근 들어 한골차 승리가 너무 많은데, 이 리드를 지키는 모습도 위닝 멘탈리티가 갖춰진 팀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제 경기는 아스날 팬들에게 굉장히 특별했다. 지난 몇 년간의 암흑기에서 아스날을 지켜주는 골키퍼 레노는 이번 시즌 램스데일의 영입으로 No.2 키퍼로 밀려나게 됐다. 어제 램스데일의 부상으로 레노가 정말 오랜만에 선발출전하게 되었는데, 안정적인 모습으로 클린시트를 지켜냈다. 특히나 마지막 쿠티뉴의 프리킥을 레노가 선방해내고 경기 종료 휘슬이 울렸을 때, 모든 선수들이 레노에게 달려와 같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울컥했다. 경기 후에도 램스데일과 레노가 서로 활짝 웃으며 안아주는 모습을 보고 팀이 드디어 하나가 되었구나 느낄 수 있었다. 이번 경기 승리로 인해 아스날은 5년 만의 챔피언스리그 복귀에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스포츠는 복잡 미묘하다. 그 안에 여러 이야기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기뻐하고 또 슬퍼한다. 어떤 이들은 그런 감정들을 너무 과격하게 표출하여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그런 감정을 적당하게 표출할 수 있다면 스포츠는 그 무엇보다 인간적이다. 아스날이 보여주는 축구도 이야기가 있다. 아스날과 함께한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 이야기는 점점 의미가 있어지고 크게 다가온다. 언제 이 팀이 리그나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날이 오기까지 참고 기다리며 팬으로서 이들이 보여주는 축구를 응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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