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나아가 한국을 떠난 이유

by Zorba

나는 2019년에 주식을 시작했다. 그 당시 모아둔 자산이 300만 원 정도 있었는데, 그중 절반 정도를 투자해 네이버를 매수했다. 그 당시 주가가 10만 원 초반 언저리 었는데, 정확히 10주 정도 샀던 기억이 난다. 당시 주식을 하던 친한 형이 첫 시작은 본인이 가장 잘 알고 관심 있어하는 분야의 회사를 투자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던 조언을 정직하게 따랐다. 나는 IT 산업에 관심이 많았고 특히나 네이버를 좋아했으며, 회사가 돈 버는 것에 비해 저평가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주식을 보유하고 있으니 정말 회사에 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네이버 관련 기사가 나올 때마다 누구보다 꼼꼼하게 읽고 민감하게 반응했다. 2020년 코로나가 찾아왔고, 언택트 비즈니스의 대장격인 네이버는 어느새 30만 원을 훌쩍 넘겼다. 비록 적은 돈이었지만, 첫 투자의 성공은 달콤했다.


2021년. 대학교 4학년. 나에게도 오지 않을 것만 같던 진로 결정의 시기가 찾아왔다. 대학시절 내내 창업의 꿈에 부풀어 끝없이 도전했던 나는 그 어떤 인턴, 학회, 교환학생, 대외활동도 하지 않았다. 그 사업이 실패로 끝난 후 주변을 둘러보니, 친구들은 보니 이미 군대를 다녀온 직후부터 정석루트로 스펙을 쌓고 있었다. 여느 경제학 전공생들처럼 대부분 금융 쪽으로 취직하기 위해서였다. 지난 2~3년의 시간 동안 대부분의 과친구들과 나는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다 보니 어느새 앞으로 살아갈 인생이 나뉘게 되었다. 이제 와서 다시 남들을 따라가는 것은 늦었을뿐더러 내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도 아니었다. 내가 지금 당장 어느 회사를 가장 가고 싶은지 고민해 봤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곳은 네이버밖에 없었다. 숨도 안 쉬고 오르는 이 회사의 차트를 매일같이 바라보면 나도 모르게 네이버와 사랑에 빠졌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친구들은 모두 여의도나 광화문으로 향했고, 나는 분당 정자동의 한 초록색 빌딩을 목표로 취업준비를 시작했다.


여전히 코로나 시기라 회사 차원에서 채용을 대규모로 했던 게 득이 되었다. 덕분에 나는 운이 좋게도 태어나 처음 지원한 회사에 최종 합격하게 되며 네이버에 무혈입성하게 되었다. 남들과는 다르게 살아오느라 화려한 스펙하나 보유하지 못했지만, 단 한순간도 열심히 살지 않은 날이 없었던 지난 대학 시절을 보상받은 느낌이었다. 나는 그렇게 네이버의 기획자로써 커리어를 시작했다.


4년을 꽉 채우고 네이버를 퇴사했다. 나는 언제나 자유를 갈망해 왔고, 자본주의 세상에서 노동자의 신분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자본가가 되기 위한 노력을 안 한 것도 아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이런저런 핑계는 많이 댈 수 있지만 결국 중요한 건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리스크를 감당할만한 깜냥이 안되었다는 것 정도로 얼버무릴 수 있을 것 같다. 어차피 회사라는 선택지밖에 남지 않는 나는 돈이 아닌 다른 곳에서 가치를 찾기 시작했다. 성취감과 공정함. 이 두 개만, 아니 적어도 둘 중 하나만 채워지면 성공까진 아니어도 실패하지 않는 삶이라 생각했다. 다만 이 둘을 바라는 것조차도 욕심이었다.


회사 내 대부분의 의사결정 방식은 탑다운이었다. 기획자 직무의 본질과 충돌이 일어나는 지점이었다. 방금 챗GPT한테 기획자의 정의를 물어봤다. '일반적으로 무언가를 새롭게 만들거나, 개선하거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이를 구체화하여 실행을 이끄는 사람'이라고 말해준다. 다만 매년 무엇을 할지에 대한 계획은 이미 상위 의사결정권자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리고 그 계획들은 대부분 문제를 해결한 다기보단 매출을 올리는 것에 집중이 되어있었다. 기획자로써 성취감을 느끼기 어려운 구조였다. 사용자 입장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뻔히 보이는데도 그것들이 매출과 관련이 없으면 이니셔티브를 걸 수 없었다. 그렇다고 회사가 잘못한 것은 아니다. 기업의 목적은 돈을 버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저 이해관계가 다를 뿐,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래도 꾸역꾸역 주어진 일을 완벽히 해냈다. 어차피 성취감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이곳에서 인정받고 남들보다 더 많은 돈을 받고 더 높이 올라가는 것 말고는 내가 추구해야 할 목표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바라던 대로 매년 좋은 평가를 받기 시작했고 주위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연차가 쌓일수록, 성과가 좋을수록, 성취감 제로인 일들도 함께 쌓여갔다. 그러나 늘어난 일과 받는 돈은 비례하지 않았다. 사실상 누가 일을 잘하냐에 관계없이 성과급은 거의 대부분 동등하게 배분되었고, 연봉도 거의 비슷한 퍼센티지로 올랐다. 쉽게 얘기하면 저기 아무것도 안 하는 7년 차가 매년 좋은 평가를 받는 3년 차보다 월 실수령액이 월등하게 높다는 것이다. 공정하지 못하다고 느꼈다. 허탈했다.


60년 전 열심히 일을 하는 사람과 아무것도 안 하고 빈둥대는 사람이 받는 품삯이 똑같은 나라가 있다고 들었다. 열심히 일을 하는 사람도 서서히 놀게 되었다. 그렇게 받는 품삯이 점점 줄어들어 어려움에 처한 나라가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다른가 고민하게 되는 순간 이곳에 남을 이유가 사라졌다. 참고로 저기 아무것도 안 하는 7년 차는 결국 회사를 옮기며 몸값을 올렸다.


그때부터였나. 삶의 다음 스텝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고민이 깊어질수록 명확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몸값을 올려서 이직을 한들, 그만큼 세금이 올라서 받는 실수령액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게다가 이해가 안 되는 연봉상한선이라는 게 존재해서 내가 정규직으로 세금 다 떼고 최대로 받을 수 있는 돈은 대략 월 1000이 맥스다. 누군가는 그 액수라도 부러워하겠지만 서울 중심지 신축 아파트는 30억이 넘고, 내 월급이 멈춰있는 동안 집값은 계속 오른다. 누군가는 불평불만하지 말고 영끌해서 너도 집을 사면 되지 않겠냐고 말하겠지만, 월 300씩 이자로 내면서 직장에 평생 묶여있는 삶이 행복할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은 자유를 갈망하던 내 삶과 정반대 되는 일이었다.


회사는 그럼 왜 열심히 하는 사람한테 더 많은 돈을 주지 못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 나라에는 노동법이 존재해서 사람을 쉽게 자를 수가 없다. 인건비로 나가는 비용이 정해져 있다고 가정했을 때, 쉽게 생각하면 외국은 한 명을 자르고 그 돈으로 잘하는 사람을 더 줄 수 있는데, 우리나라는 자를 수가 없으니 이 시스템이 불가능하다. 회사가 돈을 더 많이 벌면 되지 않겠느냐 얘기할 수 있다. 우리 부서는 매년 두 자릿수 이상의 매출 성장률을 기록했다. 달라진 건 딱히 없었다. 기업의 문제인지 나라의 문제인지 알 길은 없다. 누군가는 그래도 노동자의 인권을 보호해야 하지 않냐 얘기할 수 있다. 그렇게 계속 보호하면 된다. 다만 성장과 분배는 공존할 수 없다.


조금은 늦은 시기에 사람들이 왜 문과는 변호사, 이과는 의사가 되려 하는지 알게 되었다. 전문직은 상한선이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럼 너도 변호사 준비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나이가 들수록 가성비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어릴 때는 뭐라도 해보지 하면서 부딪치는데 이제는 이것저것 따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30대로 접어든 시점에 변호사를 다시 준비하려면 꽤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일류 변호사가 되리라는 확신도 보장도 없다. 절대 안 망하는 배당 5%짜리 기업을 5년간 투자하는 게 나을 것인가, 망할 확률이 70%가 넘어가는 수익률 100% 짜리 기업을 5년간 투자하는 게 나을 것인가의 문제인 듯하다. 더 큰 문제는 후자를 선택한 후, 5년이 지난 다음에 망한 투자를 다시 복구하려 하면, 배당 5% 짜리 기업은 사라지고 망할 확률이 더 높은 기업만 선택지로 남는다는 것이다. 나의 이런 마음가짐이 성공으로 이끌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기술의 발전이 언제나 세상을 변화시킨다고 믿어왔다. 산업혁명이 그래왔고, 인터넷/모바일이 그래왔고, 이제는 AI가 그 역할을 넘겨받았다. 기술의 발전은 실제로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증가시켜 왔고, 미국은 그렇게 IT 공룡들의 선방으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가 되었다. 다만 나는 엔지니어링에는 재능이 없었기에 차선책으로 기획자로써 이쪽 업계에 발을 디뎠다. 성장하는 산업에 발을 디디고 있으면 그 물결을 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현실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여전히 기술 직군들은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고, 의대 선호도는 매년 올라가고 있다. 의사는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고귀한 직업이라고 따지면 할 말은 없지만, 나날이 늘어나는 성형외과와 피부과를 보면 대부분의 목적은 거기에 있지 않은 듯하다.


내가 느꼈던 성취감과 공정성의 문제는 이직을 한다고 해결이 될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자, 좀 더 시야를 넓히기 시작했다. 해외로 가봐야겠다. 그게 안된다면 적어도 국내에 있는 외국계 기업으로 가봐야겠다. 하지만 동시에 나의 기획자 직무를 놓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여전히 새로운 서비스를 만드는 일에 열정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나마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 세계 어디에 어떤 기업을 가든 달라지는 건 없을 수 있으나 적어도 환경을 한 번쯤은 바꿔야 한다고 느꼈다. 그러고 나서 다시 판단해도 늦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나는 아직 어렸고, 나 스스로의 인생만 책임지면 되는, 잃을게 그나마 적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도전을 망설이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이력서를 쓴 다음, 링크드인 계정을 만들고 외국회사의 Product Manager 직무를 닥치는 대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다만, 국내에 있는 외국계 회사는 거의 해당 직무를 뽑지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대부분 본사에서 서비스를 만들지 않겠는가. 네이버가 왜 기획자를 굳이 한국이 아닌 곳에서 뽑겠는가. 시작부터 쉽지는 않겠다고 느꼈다.


한국을 영원히 떠날 생각은 없었다. 일이 아닌 다른 소중한 가치들이 한국에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기엔 이보다 좋은 타이밍은 다시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성장해서 다시 돌아온다는 마음뿐이었다. 그 때가 된다면 나와 사회 둘 중 하나는 변할 것이라 믿었다. 아무래도 베스트는 내가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마음 먹은 이상 최선을 다해 부딪쳐 보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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