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한산한 11월의 제주에서 발견한 아름다운 건축
최근 들어 공간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증가했다. 이전에 알쓸신잡을 보다가 유현준 교수님의 공간과 건축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신선한 충격을 적지 않게 받았었다. 물론 그 충격은 프로그램의 종영과 함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서서히 사라졌지만, 그래도 그분의 이름은 아직 머릿속에 남아 유튜브 알고리즘이라는 도화선을 통해 다시 마음의 불씨를 지폈다. 그분 채널에 있는 다양한 영상을 보며 공간과 건축에 대해 다시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문득 책상과 침대가 한 공간에 있는 내 방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 외에도 안 쓰는 물건들이 많이 배치되어 있는 내 방을 보며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명확한 근거는 없었지만 한 공간에 한 가지만 집중할 수 있도록 물건을 배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다. 재빨리 침대를 밖으로 내보내고, 안 쓰는 물건들을 내 눈앞에서 사라지게 했다. 책상, 책장, 옷걸이만 남겨둔 채 내 방의 빈 공간을 최대한으로 확보했다. 이제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고, 이제 남은 것은 마음가짐이다.
주말에 데이트를 할 때마다 많은 연인들은 매번 공간에 제약을 느끼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자취를 하지 않으면, 둘이 함께 보낼 수 있는 공간은 필연적으로 외부에서 찾아야 한다. 누군가와 꽤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카페가 우리나라 어딜 가나 보이는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매주 데이트의 상당 부분을 할애하는 카페는 자연스레 내 관심사의 범위에 들어오게 되었고, 최근 들어 어떤 카페가 좋은 카페인지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머릿속에 그리던 완벽에 가까운 카페들을 11월의 제주에서 찾을 수 있었다. 비수기여서 그런 건지, 해외여행이 풀려서 그런 건지, 지금까지 가봤던 제주 중에서 가장 한산했고 덕분에 카페를 온전히 즐길 수 있었다.
귤꽃카페
조천에 잡은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카페였다. 30분 단위 문자 예약을 통해서만 방문이 가능했고, 지정된 시간이 아니면 문이 닫혀있어 처음에는 이곳이 폐쇄적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이 넓은 공간과 동물들을 사장님께서 혼자 운영하시는 것을 보고 그 마음이 십분 이해되었다. 카페 공간은 그리 넓지 않았지만, 주변에 귤밭이 크게 조성되어 있었다. 카페 사장님께서 귤을 따러 밖에 나가시면, 오리들이 꽥꽥 소리를 내며 엄마를 한 줄로 따라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제주도에서 마주한 그 어떤 카페보다 초록색 풀과 가장 가까이 맞닿아 있는 곳이었다. 덕분에 한 발자국만 나가면 자연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고, 곳곳의 동물들이 적막함을 깨워주었다. 귤밭을 함께 하시다 보니, 음료는 대게 귤과 관련된 것이 많았다. 주문 후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린 후에야 음료를 마실 수 있었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다른 곳에서보다 느리게 흘렀다.
귤 에이드와 귤청, 그리고 귤 몇 개를 바구니에 담아서 서빙해주셨다. 별거 아닌 데코이지만 이런 사소함이 이 카페의 특별함을 만들고 있었다. 시간을 보지 않고 느긋하게 귤청을 마시며 이른 오후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따뜻한 햇살을 맞은 주황색의 귤을 계속 보고 있자니 마음이 꽤 편해졌다. 제주도라는 이름에 너무나도 걸맞은 카페였다. 햇살을 충분히 받은 후에 집에 돌아가려 하니, 사장님께서 방금 수확하신 귤을 봉투에 넣어주셨다. 사소함 하나하나가 오늘의 기분을 좌우한다. 푸근한 마음으로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블랙이쉬레드
다음날 향한 곳은 좀 더 산 쪽에 가까운 애월에 위치한 블랙이쉬레드이다. 사실 이쪽 동네는 제주도 여행하면서 한 번도 온 적이 없는데, 꽤나 외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건물이 2층으로 크게 지어졌는데 어느 곳에 있던 창이 큼지막하게 있어서 건물 내에서도 자연과 끊임없이 마주할 수 있었다. 이렇게 대형 카페에 사람이 없다 보니 사진을 찍기에도 너무 좋았고, 큰 창으로 따뜻한 햇살이 계속 스며들어 온 건물이 빛으로 가득했다. 두 명이 앉을 수 있는 개인적인 방에 들어가 음료를 마셨는데, 앉자마자 눈앞으로 보이는 자연과 그 뒤에 도로가 굉장히 인상 깊었다.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고, 그곳에서 또 다른 카페의 모습을 마주할 수 있어, 머무르는 시간 내내 눈이 즐거웠다. 이곳은 티 전문점이었는데, 향과 맛이 상당히 진했고 색달랐다. 거기에 1층에는 티를 활용한 여러 제품들을 판매하고 있었는데, 이 역시 색다른 포인트로 고객들로 하여금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건물에 상당히 신경을 쓴 모습이 보였고, 특히나 좋았던 것은 1층과 2층의 디자인이 달라 카페 내부를 돌아다니며 구석구석 살펴보는 재미가 있었다. 건물 어디에서나 외부를 바라볼 수 있었고, 외부에는 수많은 초록잎들이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기존의 많은 제주의 카페들은 대부분 바다뷰였는데, 이러한 마운틴뷰에서도 꽤나 특별함을 느꼈다. 커피가 아닌 티를 마시면서 미각에도 새로운 경험을 줄 수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는 목이 많이 안 좋아 매번 따뜻한 음료를 주문했는데, 항상 급하게 음료를 흡입하던 예전과 다르게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면서 음료를 마시다 보니 그 시간과 공간이 다르게 느껴졌다. 앞으로는 따뜻한 음료도 자주 마시게 될 것 같다.
공백
내가 상상에서만 그리던 가장 이상적인 카페의 모습이었다. 유명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완벽에 가까운 카페는 자연을 끊임없이 마주할 수 있고, 건물 자체가 매력적인 공간이며, 카페의 본질인 커피의 맛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곳이 바로 공백이었다. 심지어 카페에 사람이 한 명도 없어서 이 완벽에 가까운 공간을 구석구석 그 누구의 방해도 없이 온전히 경험할 수 있었다. 둘러보다 보니 테이블과 의자는 전부 예술가가 디자인했다. 이러한 형태로 외주를 맡기는 것도 좋은 접근 방식인 것 같다. 뒤쪽은 벽으로 막혀있지만 앞쪽은 온전히 통창으로 되어있어서 뚫린 시선으로 내부에서 바다를 바라볼 수 있었다. 최고로 놀라웠던 것은 화장실에서도 통창으로 바다를 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1층에는 주문을 받고 커피를 만드는 공간만 있고, 모든 좌석은 지하 1층에 있어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두 공간이 분리되어 있었던 점도 의미가 깊었다. (물론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다.) 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자연을 느낄 수 있었고, 자연과 건물의 분리를 원하지 않는 이들을 위해 야외에도 꽤나 좌석이 마련되어있다.
밖에 나가서 돌로 된 길을 따라가다 보면 큰 건축물이 하나 나온다. 이 공간에는 예술품들이 전시되어 있어서 관람의 재미가 있다. 물론 나는 교양이 없고 예술에 대한 조예가 깊지 않기 때문에 뭐가 뭔지를 하나도 모르지만, 경험론에 중시하는 내가 이곳에서 시각과 청각에 대한 새로운 자극을 느낄 수 있음에 특별함을 느꼈다. 이 건축물에서 한층 내려가면 또 다른 공간이 나온다. 이곳에는 자연과 꽤나 어우러진 공간이라 곳곳이 뚫려있고 식물이나 나무들과 건물이 조화를 이룬다.
정확한 워딩은 아니지만, 좋은 건축이란 자연과 인간이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일본의 건축가인 안도 다다오가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래서인지 그가 건축한 제주도의 유민미술관과 본태박물관을 다녀온 나로서는 공백에서 꽤나 비슷한 경험을 했다. 항상 이렇게 예쁜 카페들은 커피의 맛이 아쉬운 경우가 많았는데, 여기는 그마저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물론 아직 커피의 맛을 제대로 알지는 못하지만) 꽤나 비싼 커피 가격이었음에도 그 값어치를 한다고 느낀 유일한 카페 었다.
11월의 한산함에서 나는 여러 카페의 공간을 아낌없이 경험할 수 있었고 참으로 즐거웠다. 이제부터 여행은 꼭 평일과 비수기에 몰아서 해야겠다. 다들 해외여행을 많이 가는 요즘, 틈새시장으로 국내의 좋은 공간들을 많이 찾아다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