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살이 (3)
우붓 마지막 날이다. 이제 숲 속을 떠나 바다로 향할 차례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하지도 않았는데 뭐가 그리 아쉬웠는지 하루 일정을 빡세게 잡았다. 그동안 잘 숨어있던 J의 계획적인 성격이 이제야 드러나는 건가. 전날 밤 먹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을 다 리스트업 해놓고 아침 9시 좀 넘어서 숙소를 나섰다.
발리에 오면 꼭 먹어보고 싶었던 바비굴링. 찾아보니 "바비 = 돼지", "굴링 = 돌리다"였다. 돼지를 굴려서 만든 요리니까 쉽게 생각하면 바비큐다. Warung Babi Guling Pande Egi라는 음식점으로 정했는데, 이왕 먹는 거 제대로 먹어보자는 마인드로 우붓 시내에서 20분 넘게 떨어져 있는 곳임에도 열심히 매연을 마시며 스쿠터를 끌고 도착했다. 속살이 생각보다 부드러웠고 껍질은 생각보다 딱딱했다. 각종 향신료와 함께 들어가서 잡내가 하나도 없었고 간도 적절하게 맞춰져 있었다. 사이드로 시킨 사테도 꽤나 만족스러웠다. 로컬 맛집인데 깔끔하면서 맛도 있고 가격도 착했다. 하루의 시작이 좋았다.
탁 트인 전경에서 커피 한 잔 하고 싶어서 북쪽으로 올라갔다. 목적지는 바투르 산과 호수가 보이는 AKASA Specialty Coffee. 좀 거리가 있어서 걱정이 되었지만, 가는 길이 발리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여서 세상 즐거웠다. 중간중간 과일을 짊어지고 가는 마을 주민들도 보였고, 무엇보다 매연 가득한 우붓 시내에서 교통 체증에 숨 막혀하다가 앞뒤양옆으로 뻥 뚫린 도로를 아무 생각 없이 달리다 보니 모든 근심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아... 이륜차는 나에게 사랑이다.
물론 중간에 도로 입장료를 인당 5,000원이나 받는 것을 보고, 어릴 적 집 앞 골목에서 삥 듣으려고 대기하던 형들 때문에 집을 삥 돌아가던 기억이 떠올라 짜증이 났지만, 이윽고 탁 트인 경치에 마음이 잠시 가라앉는다. 한국이었으면 아메리카노가 한 15,000원 정도 했을 텐데 여기는 뭐 5,000원도 안 한다. 날아다니는 조그만 새들을 보며 생각한다. '일출 트레킹으로 왔으면 더 좋았으려나?'
여행을 와서 자꾸 알차게 시간이 보내야 한다는 강박증이 있다. 어릴 적 놀러만 가면 맨날 그 동네에 유명한 관광지를 다 둘러봐야 한다는 아버지 때문에 힘든 기억이 있었음에도, 나 역시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이 돈을 내고 왔는데 뽕을 뽑아야 한다는 그 악바리 신념. '나는 여유롭게 여행할 거야.' 말은 번지르르하게 하면서 전날 핸드폰으로 가는 곳에 명소를 무조건 찾는 버릇. 오늘도 어김없다. 여행에 와서까지 일을 하는 것만 같다. 데드라인이 하루짜리인 프로젝트이다.
카페에 죽치고 앉아있을 시간이 없다. 바로 다음은 유네스코에 등제된 계단식 논이다. 머리는 카페에 더 있자고 애원하지만 몸은 이미 스쿠터에 앉았다. 이런 내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듯 아까 아침에 그리 매끈하던 도로가 울퉁불퉁하게 변해있었다. 덜컹덜컹. 이게 맞나 싶으면서도 구글 맵이 알려주는 대로 쓰로틀을 당겼다. 해가 머리 바로 위에 있을 때 뜨갈랄랑 논에 도착했다. 그냥 멀리서 바라보는 게 가장 아름다울 텐데 굳이 또 거기를 입장해서 30분 동안 트래킹을 했다. 온몸이 땀범벅이 되고 나서야 깨닫는다. 무엇을 위한 여행인가. 조금만 여유로워지자. 여행이든 인생이든. 나라는 사람 자체가 너무 급하다. 뜻대로 되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런 것들이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순간을 즐기자. 굳이 여행이란 게 거창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래도 음식은 먹어야지. 코코넛 원래 싫어하는데, 아 여기 코코넛 아이스크림 맛있다. 코코넛 팝콘도 맛있다. 나 원래 코코팜밖에 안 먹었는데... 여기는 진짜 또 오고 싶다. (이미 두 번 방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