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살이 (4)
발리에서 글쓰기 프로젝트 4일 차. 작심삼일을 극복했다. 이제 이 작심삼일을 8번만 더 하면 성공이다. 초록의 우붓을 뒤로한 채 이제부터 3주간 푸른 바다와 함께할 예정이다. 어렸을 때 우리 가족은 매년 여름마다 휴가로 동해를 갔었다. 10년 동안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동해를 갔다. (아버지의 끈기와 꾸준함이...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주입식 교육의 특혜로 나는 바다를 좋아하게 되었고, 늙어서는 바다가 보이는 집에서 책을 쓰는 것이 꿈이 되었다. 바다는 내가 쉽게 형용할 수 없는 곳이다. 나에게 바다는 그동안 너무 무지의 것이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이번 발리 여행의 끝에 바다를 조금이나마 이해해 있기를 바란다.
빠당바이라는 항구에서 배를 타고 길리섬으로 향했다. 진짜 전 세계 사람들이 모두 모여 보트 탑승을 기다리고 있었다. 흡사 덩케르크를 보는 듯했다. 피난민 마냥 다들 큰 배낭을 지고 캐리어를 매고 내리쬐는 태양아래서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10시 정각이 되자 슬슬 승객들이 각자의 보트에 탑승하였고, 그렇게 부두 위에 사람들은 하나 둘 발리섬을 탈출했다. 성공적인 구출 작전이었으리라 믿는다.
나는 길리섬에서 내렸다. 여기는 차나 오토바이가 없고, 마차나 자전거로 다닌다. 불편하지만 나름의 아날로그 감성이 있다. 숙소에 도착하고 바로 해변으로 달려갔다. 10월 2일에 바다를 가다니, 꿈만 같은 일이다. 동해바다였으면 입술이 새파래졌을 것이다. 길리섬에는 거북이가 자주 출몰한다 하여서 해변에 도착하자마자 스노클을 착용한 채로 바다로 입장했다. 한 마리도 못 볼까 봐 걱정했는데, 들어가자마자 나타나주었다. 1호 거북아, 고맙다. (안타깝게도 수중 촬영은 실패했다.)
꽤나 오랫동안 거북이와 함께 수영했다. 거북이는 발이 4개이다 보니, 뭔가 알게 모르게 동질감이 들었다. 물고기는 몸통을 이리저리 비틀고 수영하지만, 적어도 거북이는 평형을 하니까. 그 리듬에 맞춰서 나도 손과 발을 움직였다. 바다는 나에게 미지의 영역이다. 아는 것이 별로 없는 무지의 상태이기 때문에 바다의 새로운 것을 발견할 때마다 신비함이 밀려온다. 오늘의 거북이가 그러했다. 육지에서 바라보면 그저 지평선 아래로 푸른색일 뿐인 바다가, 잠시 얼굴을 담갔을 뿐인데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지고 있다.
즐거운 거북이와의 수영을 마친 뒤, 해변가에 돗자리를 깔고 광합성을 하며 우붓에서 산 책을 읽었다. 100 달러 스타트업. 앞에 몇 챕터 밖에 읽지 못했지만, 핵심은 남을 위한 일이 아닌, 나를 위한 일을 하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내용이다.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은 자유를 얻게 되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가치를 만들어낸다. 사업 아이템은 거창할 필요가 없으며, 본인이 열정을 가지고 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사람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얘기한다. 이전부터 여행 관련해서 아이템을 하나 구상한 적이 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 더 구체화해야겠다고 느꼈다. 아마 이 책은 분명 좋은 가이드라인이 될 것만 같다. 오랜만에 읽는 영어책이라 살짝 긴장했는데, 해변의 분위기에 녹아들어 책장이 술술 넘어갔다. 선글라스를 끼고 그늘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을 벗 삼아 바닷소리를 들으며 글을 읽는 것은 꽤나 괜찮은 독서법인 것 같다.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저녁 시간을 놓쳤다. 숙소 근처에 식당들이 생각보다 별로고 가격이 비싸서 배달을 시키려 했는데, 아뿔싸 이곳은 차랑 오토바이가 없었다. 고젝이나 그랩에서 배달이 불가능한 지역이라는 안내문구가 나왔다. 그 와중에 책에서 읽은 100 달러 스타트업을 가장 실천하는 서비스를 하나 찾았으니, 바로 길리패들러. 길리섬 전용 배달 앱이다. 길리에 있는 모든 음식점이 나오고, 주문을 하면 배달은 자전거가 한다. UI/UX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오로지 기능만 갖춘 서비스. 그 와중에 곳곳에 숨어있는 말도 안 되는 버그. 주문하는 데만 거의 20분 정도 소요된 것 같았다. 기사님이 언제 도착하는지 알 수 없다. 그저 하염없이 기다린다. 한 시간이 걸렸지만 성공적으로 음식을 배달받아서 맛있게 먹었다. 길리패들러는 나에게 효용을 주었다. 정확히 사용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잘 캐치했다. 필요한 서비스는 어떻게 해서든 사용한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준 사례이다. 저녁노을이 지는 길리섬에서 좋은 비즈니스에 대해서 몸소 배워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