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짧았던 2주간의 행복했던 기억
어떤 직업을 갖고 싶냐고 누군가 물었을 때 항상 '여행 다니면서 일하는 직업이면 다 좋을 거 같은데.'라고 답하던 시절이 있었다. 좀 더 멋진 말로 디지털 노마드라고 하던가? 한 공간에 머물러 있지 않고 이곳저곳 유목민처럼 옮겨 다니면서 일을 하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새로운 장소는 항상 나에게 낯선 즐거움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여행이 나에게 이렇게 중요한 것이 되어버렸을까.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항상 마음 한편에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욕구가 강렬하다. 그래서인지 계속 능력을 고집했던 것 같다. '내가 능력이 있으면 어디서 일하든 뭔 상관이야.' 그 첫걸음이라 생각했던 개발자를 접었으니, 언제 진정한 디지털 노마드가 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마침 코로나 시국에 뜻하지 않은 기회가 찾아왔다. 몇 달째 집에서만 근무하다 보니 지겨웠고, 무기력함이 온몸을 감싸 안았다. 뭐라도 해야겠다 방을 한번 뒤집어엎고 정리하는데, 어머니의 예전 수첩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대학교 동창의 전화번호가 적혀있었고, 어머니는 그 즉시 그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10년 만의 재회인가. 통화 내용 중 나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현재 그 이모가 가평군 조종면 현리에 살고 있다는 것이었고, 마침 방이 빈다는 것이었다. 그 길로 어머니한테 거기 2주 살이 하고 오겠다고 말씀드리고 늦은 8월의 어느 날 노트북과 모니터를 싸들고 그곳으로 향했다. 어차피 재택근무인데, 여기 집에서 무기력하게 있느니 새로운 장소에서 근무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라 생각했다. 이번에는 친한 친구를 데려갔다.
가평군 조종면 현리는 말 그대로 조그마한 '리'이다. 주위에는 산이 둘러싸고 있고, 시내에서 좀만 나가면 큰 천이 흐른다. 전원생활의 느낌이 강렬하다. 이런 곳에 너무나도 오고 싶었다. 첫날 도착하자마자 행복한 기운이 감싸 안았다. 이 동네를 보고 있자니 딱 군생활을 하던 화천이 생각났다. 거기랑 구조가 똑같다. 주위에 산이랑 물밖에 없는데, 마침 맹호부대라는 큰 군부대가 하나 있어서 어느 정도 큰 상권이 형성되어 있다. 물론 시내를 다 둘러보는데 20분도 채 걸리지 않고, 좀만 나가면 자연과 곧바로 조우할 수 있다. PC방, 노래방, 프랜차이즈 매장, 카페. 있을 건 다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내 눈길을 끈 곳이 있었다.
바로 쑤와리 질러. 많은 사람들은 여길 갸우뚱하겠지만 나같이 화천 군부대에서 근무한 사람은 모를 수가 없는 전설의 버거집이다. 사실 그때 천주교에서 종교행사할 때 항상 여기서 햄버거를 신부님께서 사 오셨는데, 이게 그렇게 맛있어서 매주 일요일이 기다려질 정도였다. 맘스터치랑 거의 메뉴가 똑같은데 여기 쑤와리 질러만의 감성이 있다. 가성비도 좋다. 근데 맛이나 가격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저 간판을 보는 것만으로도 3년 전 행복했던 기억에 잠시나마 젖어들 수 있는데. 힘들었던 군생활 속에서 얼마 있지 않은 좋은 추억을 선물해준 곳인데. (너무 궁상떨었나) 근데 여기가 프랜차이즈인 것도 소름이다. 군부대 전용 버거 프랜차이즈인가. 그렇다면 전략을 아주 잘 세운 것 같다. 한번 야무지게 먹어주고 제대로 된 현리 생활을 시작했다.
꿈꿔왔던 디지털 노마드의 삶과는 약간은 달랐다. 하루 8시간 근무하다 보니, 일을 마치고 집을 나오면 벌써 6시였다. 시내 돌아다니면서 저녁 먹고 자전거 타고 하면 금방 해가 진다. 그러면 이제 친구와 이야기하고 영화 보고 하면 하루가 끝난다. 얼핏 보면 여기까지 와서 돈 내고 이게 무슨 짓인가 싶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낯선 장소가 주는 새로움이 매일을 설레게 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은 기억은 거의 없지만 그냥 음식점을 가는 행위 그 자체가 기억에 남는다. 프랜차이즈가 아닌 커피 집이 세 개 있는데, 하나는 맛이 없고, 하나는 사장님이 너무 많이 쉬어서, 나머지 하나만 2주 내내 가서 무료 커피 3잔을 먹은 것도 좋았고 그 가게 사장님 얼굴도 기억이 난다. 김밥천국 사장님이 갑자기 문에서 나오시더니 옆에 네네치킨에 들어가서 운영하시는 것도 충격이었는데, 짜장면 집에서 팥빙수와 치킨을 파는 건 충격 그 자체였다. 너무 유쾌한 동네였다. 헬스장에 갔는데 동네 주민밖에 이용을 못한다고 해서 시무룩했던 적도 있고, 밤늦게 산책하는데 전깃줄에 참새가 떼거지로 앉아 있는 모습에 놀라기도 했다. 아 참, 닭갈비 먹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서 싸움이 난 적도 있었다. 아주 욕이 찰졌다. 한 달이 지난 지금도 모든 순간이 사진처럼 남아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러한 일상이 좋았다. 별거 아니었지만 그 모든 순간이 즐거웠다. 아마 같이 간 친구가 아니었으면 그렇게 행복하지 않았을 것 같다. 이토록 풍성한 하루하루가 되지 않았을 것 같다. 덕분에 2주의 시간이 아쉬울 만큼 빨리 지나간 것 같다.
먹었던 음식 중에 특별히 생각나는 것이 있다. 친구는 별로라고 했지만, 음식의 맛을 떠나서 이국적인 음식을 여기 생각지도 못한 현리에서 먹었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했다. 깔로께리라는 곳인데 할아버지께서 홀로 운영하시면서 그리스 음식을 전문적으로 만들고 계셨다. 이전에 그리스 사실 때 배우신 것 같은데, 뭐 생전 처음 보는 음식들이었다.
이건 무사까다. 약간 라자냐랑 비슷한 느낌인데, 안에 가지와 감자가 들어가 있고, 위에는 화이트소스가 뿌려져 있다. 만드는 데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라 전날 주문해야 한다 해서 그렇게 했다.
저것만으로는 배가 안차 수블라끼라는 메뉴를 시켰다. 빵이랑 고기랑 야채랑 싸 먹는 건데, 저기 가운데가 요거트 소스이다.
맛이 특출 나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러한 그리스 음식을 먹으면서 그 순간만큼은 나에게 이색적으로 다가왔다. 그게 음식이 주는 매력이 아닐까 싶다. 사장님의 정성이 느껴져서 좋았고, 그 가게의 모든 벽면이 그리스로 채워져 있어서 기억에 남는다.
평일을 지루한 하루를 보냈다면, 주말은 조금 달랐다. 사실 주변에 운악산이 유명하다해서 일요일에 등반하려 했는데, 10시 40분에 오고 배차간격이 3시간인 버스를 놓쳐서 포기했다. 전날 영화를 너무 집중해서 봤던 탓일까. 아쉬운 대로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강 쪽으로 가게 되었다. 밑에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니 우리도 가고 싶어졌다. 마침 저기 수심이 좀 있는 곳에 도착했는데, 옆에 아빠랑 같이 온 어린애가 물안경을 빌려준다 해서 옳다구나 하고 신발을 벗고 물로 뛰어들어갔다.
이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는 것 같다. 평생 한 번도 오지 않을 것 같은 곳에, 일요일 점심에 물안경 쓰고 수영하고 있는 내 모습이 신기했다. 내가 지겹게 얘기하던 새로운 곳이 주는 낯선 즐거움이었다. 거기에서 수영을 하는 다른 가족도 몇몇 보였는데, 얼핏 들어보니 할머니 댁에 찾아온 것 같았다. 무언가에 홀렸는지 그러한 모습까지 좋아 보였다. 심지어 날도 좋았다. 현리 덕분에 오랜만에 삶에 여유를 불어넣을 수 있었다.
거기 있는 동안 어머니 친구분께서 너무 잘해주셔서 편하게 일하고 쉬다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집에 가는 길에 현리를 돌아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내가 살면서 앞으로 여길 다시 방문할 일이 있을까?' 그러면 뭐 어떤가. 2주간 나를 행복하게 해 준 곳인데. 그것만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