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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플랑 Dec 19. 2018

가운 주머니에 꽂혀 있던 펜을 꺼내 들었다

글을 다시 쓰기 시작한 이유

 이야기를 좋아한다. 이야기 안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그리고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답니다.’이다. 그래서 안데르센이 쓴 ‘인어공주’ 원작의 결말을 처음 읽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인어공주가 물거품이 됐어! 왕자하고 결혼도 못 해 보고 죽었어. 말도 안 돼. 어떻게 주인공이 물거품이 되어 버릴 수가 있어? 이런 쓰레기 같은 이야기는 다시는 읽지 않겠어.    


 의사가 되기 전까지 나는 주인공들의 세계에서 살았다. 악당 1부터 악당 17까지가 추풍낙엽처럼 쓰러질 때, 홀로 무기도 없이 악당 열 일곱 명을 죽이고 살아남는 주인공. 큰 화재가 나면 그 빌딩의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구조해서 다친 곳 하나 없이 탈출하는 주인공. 어떤 경우에도 쓰러지지 않고, 죽지 않는, 물거품이 될 일은 전혀 없는 주인공. 내 주변 사람들은 크게 아플 일 없이 건강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행복을 누리면서 그렇게 살았다. 그래서 나는 모두에게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 기회가 주어진다고 생각했다.    


 인턴이 되고 나서 첫 달에는 거의 매일 울었다. 거의 매일 누군가 죽었고, 그 죽음은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혓바닥을 잘라 마녀에게 건네면서 다리를 얻은 인어공주처럼, 절박한 마음으로 ‘오래도록 행복하게’를 찾아 헤맸다. 병원 안에는 그러나, 그런 행복한 결말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매일 점점 더 작아졌다. 주인공이 죽었어. 어제까지만 해도 나와 웃고 떠들던 사람인데, 내가 어제 왼쪽 쇄골하 중심정맥관 소독을 했던 사람인데! 오늘은 오른쪽 정강이에 있는 상처 드레싱을 해 드리기로 했는데. 그런데 죽었어. 이렇게 물거품이 되어버리다니, 슬프고 허무해. 인생은 너무 허무해.     


 깊은 고독과 허무의 바닥에서 한참을 헤매고 난 지금은, 물거품은 물거품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느낀 것은 딱 하나, 누구나 결국 물거품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내가 자신도 모르게 노름빚을 진 뒤 자살한 이후로, 7년간 막노동을 해서 겨우 빚을 다 갚고, 빚을 청산한 기념으로 친구들에게 막걸리를 한 잔 대접한 뒤 집에 오는 길에 차에 치어 죽을 수도 있는 것이 인생이다. 결혼을 2주 앞두고 혈액암을 진단받은 뒤 약혼자가 쪽지 한 장만을 남기고 떠날 수도 있는 것이 인생이다.    


 나는 이제 평생, 영원히, 그런 말들을 믿지 않게 되었다. 한 사람의 ‘평생’이 얼마나 허무하게 갑자기 끝날 수 있는지를 수없이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더 즉흥적인 사람이 되었고 덜 계획하게 되었고 우산이 없어도 비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결심했다. 더 많이 넘어지기로.


울고 싶을 때 마음껏 울고 웃고 싶을 때는 실컷 웃고 비를 맞고 싶은 날엔 비를 맞기로 했다. 어떤 것이든 피해가지 않기로. 이 모험을 즐기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수많은 물거품들을, 추풍낙엽들을 나만의 방식으로 위로하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려 SNS계정에 올리기도 하고, 말기 암 진단을 받은 환자에게 편지를 써서 건네기도 했다. 갑작스런 사고로 장애인이 된 내 또래 환자에게 소설책을 사서 건네기도 했다. 그리고 계속 글을 썼다. 쓰고 또 썼다. 매 순간 자체를 온전히 느끼고 그것을 글에 담았다. 가끔은 생살에 소금을 뿌린 듯한 고통이 나를 찾아온다. 그러면 그 고통을 온전히 느끼려고 노력한다. 또 어떤 새벽 세 시에는 불현듯, 중환자실 한 가운데에서, 온 우주의 고독이 내게 갑자기 온다. 그러면 나는 또 마음을 활짝 열고 그 고독을 받아들인다. 혼자 잠드는 어떤 밤에는 난파선의 선장이 되어 공포 속에서 허우적대기도 한다. 이렇게 매 순간 주어지는 감정을 날것 그대로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내 주변의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작한 '쓰기'였는데, 점차 글을 쓰는 과정 자체에서 내 자신이 치유받게 되었다.


 그렇게, 죽음과 슬픔과 분노와 마주앉은 몇 년간, 나는 아주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 하지만 사실은, 어쩌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모든 것이 정해져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가운 주머니에 꽂혀 있던 펜을 꺼내 들었다.

 그 펜은 아주 오래 전부터 거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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