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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플랑 Dec 19. 2018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인턴은 주치의가 아니다. 그리고 매 달 근무하는 과가 바뀐다. 환자와의 모든 관계는 1개월의 해당 과 근무가 끝나는 시점에 함께 끝난다. 그래서 환자들과의 관계도 피상적일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인턴 생활을 하는 동안 기억에 남는 환자가 있는가, 하고 누군가 묻는다면 당장 생각나는 것만 열 명이 넘는다. 어제까지는 책상에 앉아 글로 읽던 '질환'을, 실제로 앓고 있는 '사람'을 처음 만나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의사로서의 첫 걸음을 막 떼기 시작한 3월, 내가 신장내과 인턴일 때 만났던 조ㅇㅇ할머니. 70대 여성이었고 기저질환으로 만성 신부전증이 있었는데 몇 가지 검사를 위해 입원한 분이었다. 하지 않으면 바로 티가나지만 해봐야 별 티도 안 나는 욕창 드레싱(소독)을 그야말로 전신에 매일 해야 해서 손이 많이 가는 환자였다. 보통은 욕창이 있는 환자는 주로 꼬리뼈나 발목 등 침대에 누웠을 때 잘 눌리는 부위에만 상처가 있어서, 몇 군데만 소독을 하면 된다. 그러나 조 할머니는 몸의 거의 모든 곳에 욕창이 있었다. 이전에 뇌졸중 기왕력이 있어서 자세를 스스로 바꾸기 어려운 분이었는데, 비만해서 가족들도 체위 변경에 어려움을 겪은 모양이었다.

 소독을 할 때도 할머니의 큰 체구 덕에 자세를 잡기도 어렵고, 늘 불만도 대단하셔서 잔소리를 엄청 들어야 했다. 당연히 할머니의 드레싱을 하고 나면 힘이 쪼로록 풀리곤 했다. (그래서 항상 맨 마지막으로 갔다)


 검사 몇 가지만 받고 회복 후 곧 퇴원하리라는 나의 희망과는 달리 어느 날 밤 할머니는 갑자기 정신상태가 흐려지면서 의식을 잃고 말았다. 아무도 이유를 찾지 못해서 뇌척수액 검사를 비롯한 온갖 종류의 검사를 했고 검사 결과 역시 이렇다 할 답을 내지 못했다. 그렇게 3일째 되던 날인가, 할머니가 눈을 떴다.


 그러나 의식 저하가 되기 전의 카랑카랑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할머니는 말 그대로 목소리를 잃었다. 무엇을 물어도 대답하지 않고 큰 눈만 껌벅였고 식사를 전혀 하지 않으려고 하셨다. 

 
 영상검사나 혈액 검사에서는 이상소견이 없어 '우울증 의증'으로 정신과 진료가 시작되었고 할머니의 퇴원은  기약없이 미뤄졌다. 나는 드레싱을 위해 매일 할머니에게 갔지만 표정없는 그녀의 얼굴이 안타깝고 무서웠다. 눈만 뜨고 있는 인형 같았다.


 어느 날인가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는데) 드레싱을 하면서 말이나 걸어 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일부러 과장된 미소를 지으면서 "할머니 안녕. 잘잤어? 배 안고파?"같은 안부인사를 반말로 열심히 건네기 시작했다. 내게 유독 까칠했던 간병인도 며칠 지나자 내 일방적인 대화에 동참해서 우리 둘은 열심히 할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그렇게 일주일 남짓 지났을까.
평소처럼 "할머니 안녕! 여기 어깨 위에 벌레 잡자."하고 소독을 시작하며 말을 걸었는데 갑자기 할머니가 눈을 크게 뜨며 놀라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마치 날 알아본 것 같았다.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멀리에 있던 할머니의 정신이 날 알아보고 점차 가까이 다가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놀란 표정은 이내 사라지고 할머니의 얼굴은 다시 무표정한 인형이 되었다.

다음날. 다른 병실 환자의 소독을 하고 있는데 조 할머니의 간병인이 나를 찾아 뛰어왔다.
  "선생님, 빨리 좀 와봐."
후다닥 뛰어 가 보니 조 할머니는 침대에 앉아 있었고 나를 보고는 활짝 웃었다. 할머니가 웃는 것을 너무 오랜만에 봐서 충격을 받았는데 충격에서 헤어나오기도 전에 할머니가 나를 보며
"이뻐."
라고 하는 게 아닌가!
할머니의 호전에 신난 보호자들이 잔뜩 와서 병실은 연일 축제 분위기가 되었고 조 할머니는 하루가 다르게 건강을 회복하여 며칠 지나지 않아 내게 노래도 불러 주었다. 노래제목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 꾸며낸 얘기 같지만, 진짜다. 리듬과 박자는 전부 틀렸지만 노래를 듣는 동안 정말 행복했다.


그렇게 4월이 되어 나는 다른과로 근무처가 바뀌었고 4월 중순쯤 할머니가 퇴원하셨다는 것을 다른 인턴에게 전해 들었다.


3월은 내게 정말 힘든 달이었다. 거의 매일 누군가 죽었고 나는 병 앞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해서, 항상 의기소침해 있었다. 그랬던 나에게 조 할머니는 선물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냉큼 사표를 던지고 병원 밖으로 도망가지 않도록 나를 버티게 해 준, 선물.


 그 해 5월의 어느 날, 병원 1층 카페앞에서 할머니를 다시 만났다. 한층 더 밝아진 표정으로 휠체어를 타고 볕을 쐬던 할머니는 나를 보자 예의 그 해사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까칠하던 간병인은 그만 둔 모양인지 간병인이 다른사람으로 바뀌어있었다. 나는 신이 나서 두 손을 격하게 흔들어 반가움을 표시하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잘 지내셨어요?"
  "네."

  "할머니, 요즘에도 노래 자주 부르세요?"

  "무슨 노래요?"

  "예전에, 기억 안 나세요? 저한테 노래 불러 주셨었는데.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내가 노래 첫 구절을 부르자 조 할머니는 노래를 이어 불러 주셨다. 음정과 박자가 많이 좋아진 걸로 봐서 확실히 컨디션이 회복되신 것 같았다. 반가움과 신기함에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떠났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니,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병동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는 내 등 뒤로 간병인이 조 할머니에게 물었다.
  "누구예요?"
할머니는 카랑한 목소리로,
  "으응. 모르는 사람."
하고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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