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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플랑 Jan 13. 2019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매일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은? 인턴에게 시키는 것이다. 인턴이라면, 어떻게든 넣을 거니까.

 아침에 알람도 울리기 전에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깼다. 세시반이다. 망했어! 한시에 십 분간 쉰다는게, 당직인데 콜 다 무시하고 잤나봐! 하면서 폰을 보니 콜이 하나도 안 와있다. 와 이게 웬 횡재야. 이런 날이 있네. 이게 무슨 일이야. 아이구 세상에나 감사해라. 기뻐하면서 두 시간을 더 잔다.


 밤사이 콜도 안 왔고 기분도 좋은데 머리나 감을까 하다가 그만두고 숙소 컴퓨터 앞에 앉는다. 내과공유폴더가 안 열린다. 어제 밤에 만들어 둔 명단 수정을 해야 하는데.......하여튼 숙소 컴퓨터는 자주 고장이 나서 뭐만 하려고 하면 이렇게 에러가 난다니까. 뭐 명단 수정이야 20분도 안 걸리니까 병동 가서 하지 뭐, 하면서 중환자실로 향한다. 머릿속엔 우선순위가 세워진다.

1.아침 가스(ABGA, 동맥혈 채혈)와 심전도

2.명단 수정

(밤에 만들어 둔 명단을 밤사이 입원하거나 이실한 사람을 반영해서 수정한다)

3.아침 병동콜

4.내과컨퍼런스 참여(미리 주문해 둔 김밥을 먹기 좋게 책상에 깔기)

5.분과 컨퍼런스 준비

6.아침식사    

 가뿐하게 중환자실 가스를 끝내고 심전도도 찍고 명단을 고치러 병동으로 향한다. 오늘따라 컴퓨터 자리가 없다. 여기저기 헤매다가 결국 주 병동(담당하는 과 환자들이 가장 많이 입원해 있는 병동)까지 온다. 아침에 찍어야 할 심전도가 없군! 이게 다 어젯밤 상지관 당직인턴이 밤늦게까지 사라진 환자까지 찾아다니면서 열심히 찍어둔 덕이지. 어제 상지관 당직이 누구였지? 바로 나였지 으하하하. 이런 생각을 하며 내과 공유폴더를 연다. 시간은 6시 20분. 7시 20분 내과 전체 컨퍼런스 전까지 한 시간이 남아있다. 명단 수정하기에는 아주 차고 넘치는 시간이다. 머리를 감을 걸. 안 씻은지 하루밖에 안 지났는데, 나한테 안 좋은 냄새가 나는 것만 같다.

 어?

 공유폴더가 안 열린다.

 다시 해 보자.

 어?

 공유폴더가 안 열린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어?

 어..... 이러면...... 안되는데.... .......

 공유폴더가 안 열린다는 것은 어제 밤 환자까지 반영된 명단을 열 수가 없다는 뜻이다. 그게 무슨 뜻이냐면, 난 망했다는 뜻이다.    

 6시 23분. 선택을 해야 한다. 안 열리는 공유폴더를 지금 뭐를 어쩔 것이여. 명단은 있어야 회진을 돌겠지? 그렇다면    


 처음부터 다시 치자    


 재원환자 39명, 한명씩 엑셀창에 채워 넣는다. 다행히 3월 초 명단파일 하나를 갖고 있어서 그걸로 포맷을 삼는다. 명단 순서가 엉망이 된다. 미친 사람처럼 타이핑을 한다. 명단 수정이야 다 만든 명단을 손보는 것이니 금방 하지만, 명단 만들기는 녹록치 않다. 2개 병실을 남기고 7시 18분이 되었다. "내일 내과 전체 컨퍼런스는 꼭 참여하도록 해라"라고 하시던 순환기내과 교수님의 음성이 머릿속에 울려 퍼진다. 치던 명단을 두고 지하1층 회의실까지 뛰어 내려간다.

 19분에 회의실 도착. 다행히 아직 아무도 오지 않았다. 김밥도 딱 맞춰 도착했다. 다른 인턴들과 함께 김밥을 책상 위에 늘어놓는다. 맛있는 냄새가 난다. 한 줄 먹었으면.....싶다가도 '이걸 먹고 다시 7층 병동까지 계단으로 뛰어올라가서 명단을 마저 칠 수 있나?'하는 생각이 든다. 몸이 무거워져서 못할 것 같다. 안 먹기로 한다. 이따 먹지 뭐.

 컨퍼런스 주제는 급성 심근 경색! 궁금했던 부분이어서 열심히 듣기로 한다. 그런데 강의가 시작되고 몇 분 지나지 않아 갑자기 동기 인턴선생님이 전화를 한 통 받더니 손을 든다.

 "저, 교수님."

 저 친구가 미쳤나, 투명인간이나 다름없는 인턴이 갑자기 왜 발언권을 얻지 하면서 쳐다보는데

 "중환자실 전화인데, 코드블루(심정지 환자 발생)라고 합니다, 가보겠습니다"

 내과 인턴 넷이 벌떡 일어나서 뛰어나간다. 나의 경우는 속으로 '엘리베이터님 지하1층에 계셔주세요'를 빌면서 뛴다. 야속한 엘리베이터님은 3층에 계신다. 계단으로 뛴다. 내게도 중환자실 전화가 온다. "가고 있어요!"를 외쳐주고 계속 뛰어올라간다. 김밥을 먹은 인턴 동기 둘은 배가 아프다며 뒤로 조금 쳐진다. 헤헤, 난 안 먹었지롱. 그러나 6층까지 뛰자 내가 심정지가 될 것 같다.    

 현재의 우선순위는

 1.CPR (심정지 환자에게 심장 마사지를 하는 것)

 2.명단 마저 치기

 3.분과 컨퍼런스 준비    

 코드클리어는 생각보다 빨리 왔다. 7시 45분. 이제 생각할 시간도 없다. 상지관7층까지 뛴다. 명단을 마저 친다. 56분. 망했다, 망했어. 분과컨퍼런스가 있는 8층으로 뛴다. 그런데 다행히 아직 아무도 오지 않았다. 명단을 까는데 오타가 바로 보인다. 헛, 또 있다. 하지만 이젠 어쩔 수 없다. 컴퓨터를 켜고 영상 사진 명단을 수정한다. 아슬아슬하게 교수님들께서 들어오신다. 아, 오늘도 살았어. 빵꾸 내지 않았어. 살았다, 살았어.

 하루종일 '망했어!빵꾸다!'와 '휴, 살았다. 겨우 넘어갔어.'를 무한진동하면서 보낸다. 코끼리 수 백 마리와 함께 사는 기분이다. 매일 아침, 그날의 코끼리가 주어지고 냉장고에 겨우 코끼리를 우겨넣으면서 산다. 넣지 못하면 이 코끼리에 내가 깔려 죽을 것만 같다. 하루가 너무 길어서 기절할 것 같은데 일주일은 또 어찌나 빠르게 지나가는지.

 그래도,

 매 순간 '대체 이 일의 의미가 뭐지'를 생각하지 않아도 되서 좋다. 의미를 알고 하는 일은 즐겁다. 그 일이 비록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이라고 해도 말이다.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고 존경스러운 선배 의사들도 많이 만났다. 수없이 많은 코끼리를 이미 냉장고에 넣어 본 분들.

 앞으로 나는 평생 코끼리와 함께 살아야겠지? 매일 오늘의 코끼리가 내 등 뒤에 있겠지. 겨우 한 마리를 냉장고에 넣고 나면 다음 코끼리가 기다리는 삶을 살게 되겠지. 하지만 ‘이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지 않으면 안 좋아질’ 환자들이 있으니까. 넣어야지. 의사니까.

 힘들다. 정말 힘들다.

 그래도 아직 더 힘들 수 있을 것 같다.


*위의 글은 인턴 시작한 뒤 1개월 정도 지났을 때의 일기인데, 의사가 된 지 얼마 안 된 터라 사명감 넘치는 모습이 내가 보기에도 예뻐서 다시 올려 본다. 읽는 동안 반성을 많이 했다. 언젠가부터 코끼리들을 냉장고는 커녕 냉동창고에도 넣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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