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든 낯선 제품

매너리즘 그리고 잃어버린 나

by 옅은발자국

개발자로 3년 정도 된 시점이었다. 이제 개발 업무가 어떤 것인지, 어떻게 제품 개발이 진행되는지 알고 있는 시점에 이전 제품 개발 프로젝트가 끝나고 바로 새로운 제품개발 프로젝트에 시작해야 했다. 회사에서 새로운 시도로 미국의 IDEO라는 디자인 회사에 아주 새로운 콘셉트의 디자인을 의뢰했다. 회사에서는 나름 큰 의미가 있는 프로젝트라고 생각했던 거 같지만, 나에게는 다시 시작되는 프로젝트의 하나일 뿐 그렇게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던 상황이었던 거 같다.

새로 진행된 프로젝트에서 가장 큰 해결과제는 slim이었다. 신규 콘셉트의 디자인 의도와 방향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서는 가장 얇은 두께의 제품이 되어야 했다. 결과적으로, 이전 동급제품보다 필터 두께를 13.5%를 더 줄였다. 그렇게 slim화가 어느 정도 정리 되어 간 후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최초 기획되었던 필터콘셉트의 변경이었다. 프로젝트가 중반을 넘어가는 시점에서의 필터 변경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 협력업체부터 변경을 해야 했으며 새로운 필터에 대해서 다시 협력사와 협의하여 다시 견본품을 만들고 실험하여 최적화하고... 여기에 더욱 어려운 점은 협력사의 해외기업이라 시간이 더 걸린다는 것이었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제품 개발이 거의 마무리되어 가는 시점에 실험실에서 문득 제품을 보는데 이상하게도 애정이 가지 않았다. "어, 왜 이렇게 이 제품이 낯설게 느껴지지..."는 생각이 머릿속에 남더니 떠나질 않았다. 제품을 개발하는 사람이라면 그 제품에 애정이 가고 자기 자식 같은 느낌이 드는데, 언젠가부터인지 나에게 그런 마음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왜 그럴까? 제품 개발의 처음부터 끝까지 필터개발자로 참여했고 노력을 안 한 것도 아니고 나름의 목표를 달성하고 성과가 없는 것도 아닌데...


며칠의 시간이 지나서야 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주도적으로 고민하고 해결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 의해 결정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지극히 답습된 방법으로 개발기간의 압박 속에 급급히 처리한 일, 거기에 '나'는 없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나의 육체와 나의 기본적인 사고 작용으로 그 일들이 했지만, 거창하게 내 영혼은 없었다. 특별한 열정 없이 그저 기계처럼 처리를 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특별한 애정이 없었고 별다른 느낌과 감정 없이 그냥 한 끼 식사를 때우듯 또 하나의 제품개발을 마치는 기분이었다.


큰일이었다. '내'가 사라진 거였다. 나만의 존재 가치가 사라진 것이다. 내가 이 제품을 개발한 6개월의 시간이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내가 아니더라도 그냥 누군가 비슷한 경력의 개발자가 담당자로 있었더라도 결과과가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정말 후회가 되었다. 좀 더 생각해 보니, 내 인상의 6개월을 잘라 돈과 바꾼 거 같았다. 그냥 품삯을 받기 위해 일하는 삯꾼이 된 거 같았다. 인생을 이렇게 낭비하면 안 되는데... 이 씁쓸한 경험 속에서 나는 다짐을 했다. 다시는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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