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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팬 Feb 03. 2024

신성일 씨에게 캐스팅되다.

자네. 배우 해보고 싶은 생각 없나?

리모컨으로 T.V 채널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아내가…     


“어머. 신성일이네.”    

 

“저 영화 맨발의 청춘 같다.”     


“맞아. 맨발의 청춘이네.”

    

“와. 맨발의 청춘. 진짜 오랜만에 다시 본다.”    

 

어느 케이블 T.V에서 추억의 한국영화를 방영하고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 어머니 손 잡고 따라간 동네 극장에서 이제는 전설이 되어 버린 바로 저 영화 ‘맨발의 청춘’을 보았던 기억이 모락모락 머릿속에 피어오릅니다. 벌써 육십여 년 전의 일입니다.

     

이미 몇 해 전 고인이 된 대배우 신성일 씨의 젊은 시절 모습을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요새 젊은 사람들은 60년대 70년대의 신성일 씨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스타였는지 상상도 못 할 것입니다. 어느 시대나 스타로 불리는 연예인들은 있게 마련이지만 신성일 씨는 정말 존재론적으로 차원이 전혀 다른, 그야말로 대체 불가능한 당대 최고의 아이콘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 대단한 배우 신성일 씨와의 개인적인 추억을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   


       

20대 젊은 시절이었습니다. 소공동에 있는 조선호텔 커피숍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있었습니다. 호텔 로비에 있던 그 커피숍의 이름은 ‘돌스하우스’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커피를 마시고 나오는데 웬 사람이 다가오더니 로비에서 누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전해주었습니다. 로비로 나가보니까 아니? 신성일 씨가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영화 스크린 속에서나 볼 수 있던 신성불가침한(?) 대스타 신성일 씨가 나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정말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어리둥절한 채 신성일 씨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신성일 씨 앞에 마주 섰을 때 처음 느꼈던 감정은, …나보다 키가 작네?     

 

영화 속에서는 엄청 크게 보였었는데 실제로 보니 신성일 씨는 나보다 키가 작았습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얼굴이 조금 검은 편이었습니다. 원래 검은 얼굴이었는지, 아니면 그때가 여름철이라 햇볕에 타서 일시적으로 그렇게 보였던 것인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또 진짜 놀랐던 것은 신성일 씨가 경상도 사투리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당시는 성우들이 모든 배우의 목소리를 더빙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연히 신성일 씨의 목소리도 어느 목소리 좋은 성우가 대신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던 나는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를 사용하는 신성일 씨의 모습이 매우 낯설어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


         

“자네. 배우 해보고 싶은 생각 없나?”

     

신성일 씨가 나를 만나고자 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요새로 치면 길거리 캐스팅을 당한 것입니다.      


당시는 신성일 씨가 영화사를 차리고 직접 영화를 제작하던 때였습니다. 새로 만들려고 하는 영화의 주인공 역을 맡길 신인배우를 찾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우연히 내가 신성일 씨의 눈에 띈 것입니다. 한눈에 저 친구의 마스크가 그 배역에 맞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합니다.    

 

인생이란 참으로 오묘합니다. 누구를 만나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인생을 살게 되기도 합니다.      


젊은 시절 내 앞에 나타난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신성일 씨였고 또 한 사람은 내 아내였습니다.      


내가 만약 신성일 씨를 선택하고 신성일 씨를 따라갔었더라면 나는 아마 배우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신성일 씨가 아닌 아내를 선택했습니다. 아내를 선택하고 아내와 함께 새로운 인생길을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은 점점 세월이 흐르고 흐르면서 어느덧 목사가 되는 길로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마침내 목사가 되었고, 오랜 세월 한 교회에서 목회하다 재작년 은퇴했습니다.   

  

신성일 씨와 만났던 일이 가물가물해지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신문 연예란에서 신성일 씨가 제작한 영화의 주연이 된 신인배우를 취재한 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영화의 제목은 “연애교실”이었고 신성일 씨가 직접 발탁했다고 하는 신인배우의 예명은 “신영일”이었습니다.  

    

그 기사를 읽으며 직감적으로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만약 그때 내가 신성일 씨를 선택하고 그 길을 따라갔었더라면, 어쩌면 “신영일”이라는 저 이름이 나의 예명이 되었을지도 모르겠구나.


          

***       


   

로버트 프루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노란 숲속 두 갈래로 길이 나 있었습니다.

두 길 다 가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

한동안 나그네로 서서

한쪽 길이 굽어 꺾여 내려 한 곳으로

눈이 닿는 데까지 멀리 바라보았습니다.

    

그러고는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쪽 길을 택했습니다.

이 길은 풀이 더 우거지고 발자취도 적어

누군가 더 걸어가야 할 길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이 길을 걷는다면

다른 쪽 길과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요.

    

그 날 아침 두 갈래의 길에는 똑같이

밟은 흔적이 없는 낙엽이 쌓여 있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쪽 길을 남겨두었습니다.

하지만 길은 길로 이어지는 것이어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법.  

   

먼 훗날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을 쉬며 말할 것입니다.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는데,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했노라고

그래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당신 참 많이 변했어.”     


아내가 젊은 시절의 내 사진을 들여다보며 독백처럼 속삭였습니다.  

    

사진 속의 나는 한 손에 담배를 들고 있었습니다. 비슷한 장소에서 찍은 다른 사진에는 위스키 잔을 들고 있었습니다.     

 

“당신 만나서 진짜 많이 변했지.”   

  

“이 사진 봤다면 우리 교인들이 놀랐을 거야. 장차 목사 될 사람 같은 구석이 한 군데도 없잖아.”

    

“맞아. 언제 이런 시절이 있었나 싶어.”

    

아내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당신 정말 통통 튀는 재능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나 만나서 너무 평범하게 산 것 같아. 얼마든지 다른 길을 갈 수도 있었는데 나 만나서 힘든 길 걸은 것 같아. 어떨 땐 그래서 미안해.”  

   

아내의 잔주름 자글자글한 눈가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전혀 그렇지 않아. 그 반대야.  

    

나에게 다른 길은 처음부터 없었어. 나에겐 오직 이 길뿐이었어, 나는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선택할 거야.      


내 인생에 가장 잘한 선택이 있다면, 당신을 선택하고 하나님을 만난 일이었어. 내 인생에 가장 잘한 일이 있다면, 오직 한 분 하나님을 사랑하고 오직 한 사람 당신만 사랑한 일이었어.  


        

***  


         

나는 신성일 씨에게도 캐스팅 당했고 하나님께도 캐스팅 당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신성일 씨 대신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먼저 나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내 선택에 후회가 없습니다.  

    

맨발의 청춘은 끝이 났지만, 나는 이제부터 새로운 청춘을 시작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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