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원 105일 차

다시 살아남는 중

by 파타과니아

1. 수건을 안 챙겼다. 머리에선 물을 뚝뚝 흘리고, 몸은 입던 옷으로 감싸고 겨우 나갔다. 잠옷이라고 입는 운동복을 거의 열흘 넘게 입고 있었으니 빨아야 할 때가 됐다는 신호였을까. 편하게 빨래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 옷을 오래 입으니 피부가 안 좋아지는 게 느껴진다.


2. 해고 후 뭐 하고 지냈는가. 당연히 하루는 힘들었다. 돌이켜보면 잘 나왔지만 적응이라고 할 수조차 없는 시간 동안 일한 게 스스로에게 민망했다. 회사생활이 인간관계가 반인 걸 알면서도 등한시한 게 잘못이었을까. 스스로의 의지에는 한계가 있는 걸 알아 남의 집이든 모임이든 잔뜩 신청해 내 주변을 바꾸어나가기로 했다. <남의 집> 모임을 처음 해봤는데, 이 또한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3. 한 모임에서 처음으로 브런치를 한다는 걸 공개했다. 다른 곳에서는 보통 "학생이에요, 백수예요, 직장인이에요" 숨기기 바빴는데 한 번쯤 용기를 내봤다. 뭔가 다른 시도를 해봐야 다른 결과가 나올 거 같았다. 독서실을 운영하는 분에게 공짜로 글이라도 적어드리겠다고 했는데, 거절당했다. 스스로가 봐도 부족하다. 그래도 수익은 없지만 확실한 퍼스널계정을 가지고 있다는 게 장점이라고 해서 왠지 모르게 뿌듯했다.


4. 애용하던 담배가 사라졌다. 에쎄 시크릿 시리즈인데, 캡슐마다 맛이 다르다고 하는데 그건 모르겠고, 냄새도 덜 나는 게 마음에 들어서 좋아했다. 에쎄는 아버지가 피던 담배인데, 아버지를 따라 체인지를 애용하다가 냄새가 심해서 바꾸었다. 나머지는 핀 후 냄새가 마음에 안 들고, 그램은 냄새는 덜 나는데 너무 얇아서 별로였다. 최근 이츠퍼플이라는 담배를 샀는데 영 이상한 향이라서 피면서도 불만이다. 이래서 괜히 사람들이 피던 거 피는가 보다. 군대에서 원빈이 핀다고 한라산인가를 꾸역꾸역 다 피웠던 게 떠올랐다.


5. 술도 다 마셨다. 해고 전후로 취향이랍시고 사놨던 전통주들을 한 잔씩 비우다 보니 한 달도 안 돼서 7병을 마셨다. 좋은 취미도 아닌 거 같고, 뭐니 뭐니 해도 재밌고 즐거운 건 남들이랑 할 때 좋은 거라 앞으로는 차라리 이 돈으로 사람들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6. 유통기한 임박 도시락을 골라 사고 있다. 인터넷에서 한 달 남은 유통기한 임박 도시락이, 개당 천 원이길래 정말 잘 먹고 있다. 추천 키워드는 도시락, 닭가슴살, 곤약젤리다.

7. 브런치로 회사 제안이 왔다. 몇몇 곳은 스스로가 어딘지 밝히지도 않고, 자세한 소개도 없어 기대 안 하고 있었는데, 처음으로 제안 같은 제안이 왔다. 조금 기쁠지도.


8. 전셋집을 알아보는 중이다. 벌써 계약서까지 적었고, 대출 서류도 제출했다. 빠르면 다음 주, 늦어도 다다음주부터는 전셋집 생활이다. 빠른 출가와 회사 적응을 위해 고시원에 왔는데, 회사는 잘렸고, 굳이 지금 지역에 머물 필요는 없다. 이 지역은 특히 오피스 지역이라 원룸 오피스텔은 거의 없다. 서울대 쪽이랑, 모교인 00 대쪽을 고민 중이었는데 00 대쪽으로 결정했다.


9. 서울대는 방값이 싸고 역도 가까웠지만 안 살아본 곳이었고, 00대는 모교라 그나마 대충 인프라도 알고, 본가랑도 가까웠다. 서울대 근처는 특히 대학원을 다니는 친구들과, 전 직장 동료도 있어 끝까지 고민이 됐다. 그렇지만 마음에 드는 방이 없어 3번을 보러 갔다. 지하방을 넓게 쓰면서 남는 돈으로 헬스장에 가려고 했는데, 최근 폭우, 폭설 문제가 자주 발생해 아닌 거 같았다. <고시원 생존기>에 이어 <반지하 생존기>까지 쓸까 하다가 일상을 팔아먹는 짓은 적당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10. 공간이 참 중요한 거 같다. 최근 <남의 집>으로 한강뷰가 3분 거리인 오피스텔에 다녀왔다. 파티룸이라 주거공간은 아니었지만, 도착 전 한강을 걸으며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고 꽤 깊게 고민했다. 끝나고 다 같이 역으로 가는 길에서도 한강을 마저 걸으며 언젠가는 꼭이라는 생각을 했다.


언젠가는 꼭.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