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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eyooe Jan 08. 2019

내가 재관람은 못해도

<PMC: 더 벙커>를 보고


두통과 메슥거림. <PMC: 더 벙커>를 보는 동안 생긴 증상이다. 그 때문에 팝콘은 손도 못 댔다. 점심도 먹지 못했다. 그러나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날 때린 건 네가 처음이야’라고 말하는 남자주인공의 심리를 알 것 같았다. 영화가 끝난 뒤 두통약을 입에 넣으며 속으로 말했다. ‘날 이런 식으로 힘들게 한 한국영화는 네가 처음이야’라고.      


출처 = 한국일보, 「추석 한국영화 4파전… 골라보는 재미 속 ‘과열’ 우려」,   2018-09-10


나는 한국영화를 기대하지 않는다

지난 몇 년간 나는 한국영화를 견디기 어려웠다. 지루했다. 명절 극장가에는 아직도 결혼은 언제 할 거냐고 묻는 친척처럼 권력 다툼을 다룬 사극이 어김없이 등장했다.


한국 사회를 비판하는 영화는 질문을 하는 영화가 좋은 영화라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은 채 이게 다 무능한 공권력과 부조리한 시스템 탓이라는 똑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연쇄살인마와 사이코패스가 신종 직업군으로 부상했고 남성 배우들은 모두 히스 레저가 연기한 조커를 가슴에 품고 연기했다. 남성 캐릭터가 가장으로서 밥벌이의 고단함을 눈물 콧물 쏟아내며 한탄하는 동안 여성 캐릭터는 집에서 직장에서 거리에서 죽임을 당했다.      


무엇보다 노력 없이 관객을 힐링시키려는 영화를 보고 나면 나는 도리어 병을 얻은 기분이 들었다. 이런 한국영화판에서 <PMC: 더 벙커>는 분명 별종이다. 그게 지금 이 영화가 필요한 이유다.     


출처 = 씨네21, <PMC: 더 벙커>


신선함에 어지럼증은 덤

주인공인 에이헵(하정우)의 직업은 의사·검사·변호사도 사이코패스도 아닌 미국 민간군사기업(PMC)의 블랙리저드팀 팀장이다. 에이헵와 그의 팀원들 그리고 북한인 의사 윤지의(이선균)가 갇힌 곳은 이전의 한국영화에서 본 적 없는 판문점 내 지하 벙커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군사 작전은 시점숏과 드론 촬영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찍었다. 관객이 직접 벙커에 들어가 총탄을 발사하고 폭탄을 던지는 듯한 느낌이 드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여기에 이선균이 직접 카메라를 든 채 에이헵과의 영상통화 신을 소화한 덕분에 현장감과 관객의 어지럼증 증세도 강화됐다.      


출처 = 씨네21, <PMC: 더 벙커>


설계자로서의 김병우 

이런 신선한 외형을 갖춘 영화가 김병우 감독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은 놀랍지 않다. 감독에게는 전작 <더 테러 라이브>에서 걷기 마니아인 배우 하정우를 좁은 뉴스 스튜디오 안에 가둬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고 그의 생살여탈권을 인이어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던져준 전력이 있다.      


할 줄 아는 걸 잘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는 김병우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도 완벽에 가깝게 상황을 통제해 관객에게 서스펜스를 주는 장기를 이어갔다. 감독이 지하 벙커 세트를 직접 레고로 만들어 스태프들에게 설명했다는 최원기 프로듀서의 후일담에서 나는 촬영장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한국인과 북한인이 콤비를 이루는 데도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을 동포애로 풀지 않는다는 점 또한 새롭다. 두 사람에게 한민족이고 아니고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극 중에서 에이헵은 윤지의를 ‘북한’으로 윤지의는 에이헵은 ‘남한’이라 부르는데 그들에게 국가는 이름 대신 부를 만한 무엇 정도일 뿐이다. 산전수전을 함께 겪으며 생긴 동료애야말로 서로를 구해야 할 유일한 동기다.      


출처 = 씨네21, <PMC: 더 벙커>


아빠 되는 게 중요한가요

<PMC:더 벙커>는 견고한 외벽을 뚫고 안으로 들어가면 부실한 부분이 목격되는 영화이기도 하다. 특히 에이헵에게 부여된 아버지 서사는 사족처럼 여겨진다. 영화 초반부에 에이헵이 곧 아빠가 될 거란 사실이 관객에게 전달된다. 이후 그는 아내로부터 출산할 것 같다는 전화와 태어난 아기의 사진이 담긴 문자를 받는다. 이는 그가 집으로 무사히 살아 돌아가야 할 사람이란 걸 강조하기 위한 장치로 보인다.  


그러나 에이헵의 생존 욕구는 벙커 안에서 끝까지 싸우는 팀원들과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윤지의와의 관계를 통해 충분히 확인된다. 약 먹을 시간처럼 때맞춰 찾아오는 외부로부터의 소식이 어색하고 군더더기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김병우 감독은 관객이 무엇에 쾌감과 재미를 느끼는지, 사람들이 왜 극장에 가려고 하는지 깊이 고민한다고 밝힌 바 있다. <PMC:더 벙커>는 그가 찾은 해답처럼 느껴진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공간과 캐릭터 그리고 연출 방식은 그동안 한국영화의 관습과 타성에 지쳐 떠난 누군가의 발길을 돌리기에 충분하다. 부족한 디테일을 채워나가는 건 이제 2편의 장편 영화를 세상에 내놓은 감독 본인의 몫이다.  




[chaeyooe_cinema]     

PMC: 더벙커 / Take Point

감독 김병우



지금 한국영화판에 필요한 한국영화 같지 않은 한국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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