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을 보고
<캡틴 마블> 때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이번에는 ‘닦을 것’을 잔뜩 챙겼다. 상영관 입장 직전에도 티켓이 아닌 휴지와 손수건이 있는지를 재차 확인했다. <생일>은 그런 것들이 없으면 쏟아지는 눈물을, 터지는 울음을 감당할 수 없는 영화였다. 세월호 참사 이후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였기 때문이다.
지난 3월 18일, 5번째 4월 16일을 한 달 앞두고 광화문 광장의 세월호 천막이 1,709일 만에 철거되었다. 애도의 공간이 사라진 지금, 때마침 이 영화가 우리 곁을 찾아와 그 자리를 대신하고자 한다. 참석 후기부터 먼저 말하자면, 그곳은 어떤 편견도 오해도 없이 그저 함께 울 수 있는 자리였다.
그날을 위한 저마다의 시간
브룩 노엘과 패멀라 D.블레어는 「저마다의 속도로 슬픔을 통과한다」(2018, 글항아리)에서 ‘우리는 모두 같은 방식으로 애도한다’는 것을 애도 과정에 대한 첫 번째 잘못된 믿음으로 소개한다. 그들은 삶의 경험과 나이, 성별, 건강 상태 그리고 고인과의 관계 등에 따라 각자 고유한 방식으로 ‘애도를 하게’ 되는 것이라고 바로잡는다.
영화 <생일>은 이 조언을 반영한 작품이다. 영화는 가족 중 누군가의 죽음을 ‘가족의 상실’로 뭉뚱그려 설명하는 다반사를 피해 애도 주체를 개별화하는 작업부터 먼저 한다. 그리하여 영화는 3년 전 여객선 침몰 사고로 죽은 수호(윤찬영)의 엄마 순남(전도연)과 아빠 정일(설경구) 그리고 동생 예솔(김보민)이 수호 생일 모임에 참석하기까지 각자 어떤 애도의 시간을 거쳤는가를 보여주는 데에 골몰한다.
앞서 언급한 책에서 인용한 정신의학 진단서 「정신 장애 진단 및 통계 편람(DSM)」에서는 아이의 죽음에 대해 부모가 겪는 스트레스를 ‘재난 수준’으로 본다. 캐서린 M. 샌더스 박사는 저서 「애도에서 살아남기」(1992)에서 배우자의 사망 이후 생존 배우자가 새로운 삶의 단계에 이르기까지 3년에서 5년이 걸리지만, 아이를 잃은 부모의 경우 10년에서 20년 또는 평생에 걸쳐 애도한다는 전문가들의 중론을 밝혔다. 종합하면 이제 겨우 애도 3년 차인 수호 부모의 삶이 그날 이후 재건되지 못하는 건 마땅하며 그들에게 지겹다, 그만하라는 소리를 들어도 되는 시기는 영원히 오지 않는다.
스스로를 돌볼 수 없는 순남
순남이 지금껏 고수하고 있는 애도 방식은 ‘부정’이다. 그는 아직 아들의 죽음을 인지하지 않았기에 자신을 유가족으로 둘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차안의 볼륨을 높여 미수습자를 알리는 거리의 외침을 지우고, 단체 행동에도 빠진다. 또한 순남에게 상실의 고통은 타인과 나눌 것이 못 된다. 그것은 아직 순남 개인의 것이다. 아이들 사진을 앞에 두고 음식과 웃음을 나누는 유가족들에게 소풍 오셨냐고 쏘아붙이고, 수호 생일 모임을 극렬하게 반대하는 건 그 때문이다.
그러나 순남은 본디 수더분한 성정의 소유자다. 마트 캐셔로 일하는 그는 교대 근무자가 5분씩 늦어도 괜찮다며 미소 짓고, 엄마를 따라온 꼬맹이에게 사탕을 건네기도 한다. 그런 순남이 집으로 돌아와 수호 엄마로만 존재할 때면 매복돼있던 감정이 예고 없이 튀어나와 그를 덮친다.
거기에 순남은 속수무책이다. 날개 뼈가 보이도록 무릎을 껴안고 멍하니 앉아 있거나 눈물방울이 맨얼굴을 구르도록 두거나 어떨 때는 옆집 이웃이 헐레벌떡 달려올 정도로 울음덩어리를 토해내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밀양>(2007) 이후 배우 전도연의 뒷모습만 봐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나로서는 가방 속을 헤집어 닦을 것이 얼른 손에 잡히길 바라는 것이다.
뒤늦게 보호자가 되려는 정일
순남이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듯 정일 역시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정일은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지만 가장 불행했던 시기의 가족을 곁에서 지키지 못한 불운한 가장이다. 그는 수호가 죽고, 그 사고가 사건이 되어가던 3년간 베트남에서 회사 문제로 수감 생활을 했다.
늦게나마 정일은 가족을 찾아가 남편과 아빠 노릇을 하려 하지만 여의치 않다. 이제 순남에게 정일은 이혼 서류 절반을 채워줄 관계자이고, 예솔에겐 도어 록 비밀번호를 보여줄 수 없는 모르는 아저씨일 뿐이다.
정일이 애쓰지 않아도 알게 되는 건 자신이 수호 아빠라는 감각이다. 정일에게 비행기 안 작은 창문 너머의 구름 같던 상실은 아들 방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구체화된다. 그때부터 정일은 자신만의 애도 작업을 시작한다. 그의 애도 방식은 ‘의미 찾기’다. 그는 출입국 사무소를 찾아가 텅 빈 수호의 여권 속지에 출국 도장을 찍어달라고 애원하고, 수호 생일 모임 추진에도 협조한다.
이상한 나라의 예솔
예솔은 이중 상실을 경험한다. 오빠를 잃은 예솔은 부모도 잃은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특히 엄마가 지금 나를 보호할 수 없는 상태라는 걸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오빤 밥도 못 먹는데, 넌 반찬 투정이냐’며 자신을 문밖으로 쫓아내고, 오빠 옷만 잔뜩 사와 즐겁게 코디하는 엄마가 예솔은 낯설다.
‘수호’라는 이름에 멈칫하는 엄마 아빠와 다르게 예솔은 곧잘 오빠 이름을 내뱉지만 그렇다고 예솔이 마냥 천진한 어린애는 아니다. 바다에게 오빠를 빼앗긴 예솔은 자기 집 욕조도 못 들어가는 애가 되었다. 갯벌만 봐도 뒷걸음치는 애가 되었다. 물을 거부하는 건 예솔만의 애도 방식이다.
초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마다의 애도를 거쳐 마침내 순남과 정일 그리고 예솔이 함께 생일 모임에 참석한다. 이 모임의 뜬금없는 참석자는 다름 아닌 관객이다. 준비된 순서가 하나둘 진행될수록 관객은 영화를 본다는 감각을 넘어 그 공간 안에 자리를 잡고 앉은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된다.
이 신 전체가 롱테이크로 찍혔기 때문이다. 후일담에 따르면 이종언 감독은 그 순간 배우들이 실제로 느낀 감정을 그릇으로 떠서 옮기듯 그대로 관객에게 전하고 싶어 컷을 나누지 않았다고 한다. (씨네21, <생일> 이종언 감독 -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를 보여줬다)
감독의 초대에 나는 맨 뒷줄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수호와 함께 그냥 비를 맞으며 길을 걸었다던 친구의 즐거운 추억을, 수호가 살려준 생존자의 죄책감 섞인 고백을, 수호의 마지막 전화를 받지 못했다는 순남의 한탄을, 수호가 찾아왔었다는 정일의 절규를 들었다.
이 글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브룩 노엘과 패멀라 D. 블레어는 ‘모임이 줄 수 있는 장점 중 하나가 면역력을 향상시켜준다는 것’(「저마다의 속도로 슬픔을 통과한다」)이라고 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렇게 수호의 사람들과 함께 30분가량을 울고 웃고 나니 묘한 안정감이 찾아왔다. 기운이 솟았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순남도 정일도 예솔도 그래 보였다. 다행이었다. 이제 나는 이 마음을 가지고 기다릴 것이다. 그들이 없는 5번째 4월 16일을.
[chaeyooe_cinema]
생일 BIRTHDAY
감독 이종언
어떤 편견도 오해도 없이 그저 함께 울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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