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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eyooe Dec 19. 2019

내가 믿는 게 꼭 진실이 아니더라도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을 보고


파비안느 가족을 만난 그 주에 나는 마이어로위츠 가족도 만났다. 마이어로위츠 가족은 노아 바움백의 영화 <더 마이어로위츠 스토리스>(2017)에 등장하는데 이 집 아들 매튜 마이어로위츠(벤 스틸러)의 한 마디는 파비안느 가족도 할 법한 말이다.      


조각가인 아버지의 회고전에서 마이크를 잡은 매튜는 아버지가 그냥 나쁜 사람일까 봐 더욱더 훌륭한 작가라고 생각했다고 아이처럼 울며 고백한다. 매튜의 아버지는 정말 훌륭한 아티스트일까.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다.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것을 매튜가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 핵심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신작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도 그 모호한 삶의 동력에 관심을 둔다.      


출처 = 네이버 영화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모든 것은 회고록에서부터 시작된다

따로 사는 가족끼리 무슨 일이 생겨야만 만나는 건 프랑스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회고록 출간을 앞둔 노년의 영화배우 파비안느(카트린 드뇌브)와 딸 뤼미르(줄리엣 비노쉬)가 재회한 뒤 며칠을 담은 가족 드라마다.     


미국에서 시나리오를 쓰는 뤼미르가 남편 행크(이선 호크)와 딸 샤를로트(클레망틴 그르니에)까지 대동해 프랑스 옛 집에 방문한 목적은 은밀하다. 회고록 속에 나는 어떻게 서술되었는가. 밤새 수사 보고서 읽듯 꼼꼼하게 원고 검토를 마친 뤼미르는 아침 댓바람부터 파비안느를 찾아가 회고록에 진실한 내용이 하나도 없다며 소리친다. 기막혀 하는 딸에게 엄마가 내놓는 대답은 수상 소감이 따로 없다. “나는 배우라서 진실이 중요하지 않아.” 뤼미르는 할 말을 잃는다.


출처 = 네이버 영화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파비안느가 믿는 진실 혹은 진실에 가까운 것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진실만을 추구하며 살 필요는 없다고 말하는 영화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프랑스에 가서도 내가 믿는 것이 진실에 가까운 무언가이거나 설령 거짓이라 할지라도 살아가게 한다면 괜찮다고 등장인물과 관객 모두를 다독인다.      


파비안느는 자기 자신이 좋은 배우라고 믿는다. 믿어야만 한다. 좋은 엄마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좋은 배우가 되는 것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만약 좋은 배우가 되는 것에 실패했다면 나쁜 엄마로도 모자라 나쁜 배우까지 되어버린다. 그런 최악의 결과표를 파비안느는 받아 보고 싶지 않다.     


커리어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불안감을 떨치기 위해서라도 믿는다. 믿어야만 한다. 파비안느는 프랑스의 아카데미 시상식 격인 세자르상 수상 경력이 있고 회고록을 낼만큼 평단과 대중에게 인정받는 배우다. 현재 시나리오도 꾸준히 들어오며 영화도 찍고 있다. 그러나 그는 칠십의 노인이기도 하다. 현역 배우로서의 수명이 얼마나 남았는지 따져볼 만한 나이다.      


최선을 다한 신에서 감독에게 오케이를 받지 못해 낙담한 파비안느는 촬영장을 나와 차 뒷좌석에 탄 뒤 운전석에 대고 묻는다. “나 배우로서 끝난 걸까.” 그러고는 앞에서 답변이 오기 전 후다닥 먼저 입을 뗀다. “대답하지 마. 진실이 튀어나올까 봐 두려워.” 좋은 배우이니까 계속 연기할 수 있다. 그 주문이 지금의 파비안느에게는 필요하다.     


출처 = 네이버 영화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뤼미르가 믿는 진실 혹은 진실에 가까운 것

뤼미르도 파비안느가 좋은 배우라고 믿는다. 믿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어린 자신에게 등한했던 엄마를 그나마 받아들일 수 있다. 엄마가 중학교 때 출연한 공연을 보러 오지 않고 한 번도 자신을 마중 나오지 않은 건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좋은 배우가 되느라 바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뤼미르가 찾은 파비안느의 딸로 살아가는 방법일 것이다. 중년이 된 뤼미르는 태초부터 악한 사람이 아닌 어쩔 수 없이 나쁜 엄마를 마음껏 용서하지 않으며 파비안느 곁에 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지금 당장 여기에서 다시 시작

진실은 조작할 수 없는 하나지만 진실이라고 믿는 것은 내가 만들 수 있으며 여러 개여도 상관없다.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며 타인에게 믿었으면 하는 말을 건네며 사람은 삶을 ‘끊임없이 고쳐(이동진 평론가)’ 살 수 있다. 바로 그것이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삶에서 희망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영화 후반에 파비안느는 뤼미르에게 사실은 어릴 적 너의 공연을 보러 갔었다고 말한다. 샤를로트는 뤼미르가 시킨 대로 파비안느에게 가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할머니가 지금 출연하는 영화에서처럼 할머니도 늙지 않는 우주로 가는 우주선을 타서 나중에 배우가 된 자신을 보았으면 좋겠다고 연습한 대사를 읊는다.


파비안느가 정말 그 공연에 갔었는지 샤를로트가 정말 배우가 되고 싶은지 진실은 알 수 없다. 그러나 각각의 장면에서 뤼미르와 파비안느는 기쁨을 숨길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마당에 사는 거북이가 할아버지라고 믿는 아이처럼 말이다.




[chaeyooe_cinema]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La vérité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是枝裕和



그때로 되돌아갈 수는 없어도 지금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그 희망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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