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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eyooe Nov 22. 2019

과거로 가지 않는 편지

<윤희에게>를 보고


<윤희에게>는 달리는 겨울 기차의 차창 밖 풍경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끝없이 이어지는 눈 덮인 집과 바다는 그 자체로 영화적인 동시에 문학적이어서 소설과 시의 몇몇 문장을 떠오르게 한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설국」, 가와바타 야스나리. 1937)

눈은 푹푹 나리고 /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1938)

말이 토하는 숨은 완전히 새하얬고, 순식간에 서리가 되어 코와 눈 주위에 달라붙는다. 마차 위에서 바라본 마을은 눈이 아플 만큼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마쓰이에 마사시, 2016)     


홀로 이 문장들을 장면 아래쯤에 자막으로 달다 보니 도착했다. 일본 홋카이도 오타루 시. 그곳의 빨간 우체통에 편지 한 통이 쓴 사람 모르게 들어간다. 수신인은 윤희, 한국에 사는 윤희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윤희에게>


뜻밖의 편지, 뜻밖의 여행

윤희(김희애)에게 쓴 편지는 예기치 않게 부쳐진 것에 호응하듯 윤희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먼저 개봉된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윤희의 딸 새봄(김소혜)이다. 대학 생활 보다 이혼한 엄마에 더 관심이 많은 새봄은 편지 발신인인 쥰(나카무라 유코)이 엄마에게 각별한 사람임을 짐작한다.      


아빠(유재명)보다 엄마가 더 외로워 보인다고 판단해 함께 살 사람으로 엄마를 선택한 딸이다. 두 사람을 재회시키기로 한 새봄은 능청스레 엄마에게 자신의 졸업 기념 해외여행을 제안한다. 당연히 여행지는 눈이 많이 내리는 곳이면 좋겠다고 새봄이 엄마에게 살짝 흘렸듯 오타루, 쥰이 사는 오타루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윤희에게>


두 소녀를 볼 수 없다

<윤희에게>는 필연적으로 과거형인 편지를 핵심 소재로 사용했음에도 명백한 현재형 영화다. 추억에 잠기지 않은 영화는 비정규직 배식원으로 일하며 딸과 단둘이 사는 윤희와 고모 마사코(키노 하나), 고양이 쿠지라와 함께 사는 수의사 쥰의 하루하루를 따라간다.      


마치 과거로 돌아가길 저항하는 듯 영화 속에 그 시절의 플래시백은 단 한 숏도 없다. 영화가 허락한 윤희와 쥰의 얼굴은 어떠한 젊음의 붓질도 받지 않은 중년 여성 배우 김희애와 나카무라 유코의 얼굴이다. 관객이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20년 전 둘의 모습은 그들 각자가 앨범과 액자 속에 간직하고 있는 사진이 전부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윤희에게>


새봄이 필요해

영화의 현재성은 새봄이란 캐릭터가 가진 부피감으로 더욱 두드러진다. 새봄은 윤희와 쥰이 함께 했었던 과거에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는 인물이다. 윤희의 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봄은 존재 자체로 현재적이다. 그런 새봄이 영화 속을 부지런히 휘돌아다닐수록 영화는 지금의 활기로 가득 찬다.      


그런 에너지는 새봄이 한 살 많은 남자친구 경수(성유빈)와 있을 때 가장 샘솟는다. 둘은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몰래 드라이브도 나가지만 아웅다웅하는 십 대 커플은 사실 나란히 걷기만 해도 생동감을 준다. 또 새봄은 일대일에 특히 강해서 아빠와 엄마 심지어 쥰의 고모와 쥰과도 독대하는데 그때마다 이 쿨하고 똑 부러지는 여고생은 어른의 세계에서 나는 세월의 퀴퀴한 냄새를 단숨에 탈취하고 희망적인 분위기로 바꾸는 역할을 한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윤희에게>


부끄러움 없이 사랑이라고

동성애를 눈밭에 묻어 꼭꼭 숨기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윤희에게>는 두 사람의 감정은 사랑이라고 당당하게 선언하는 영화다. 영화는 서로에게 쓴 편지를 읽는 윤희와 쥰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을 통해 이러한 입장을 표명한다.      


처음과 끝은 물론이거니와 중간중간 삽입된 내레이션에는 네 꿈을 꾼다는 그리움의 표현 이상의 가슴을 치는 사실이 담겼다. 병에 걸렸다고 생각한 가족에 의해 정신병원에 다녔고 친오빠의 소개로 만난 남자와 일찍 결혼해버렸다고 윤희는 말한다. 그 사실을 고백하는 김희애 배우의 목소리가 한없이 꼿꼿하기만 해서 나는 윤희가 더 앙상한 겨울나무 같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나는 윤희의 저린 맨손을 꼭 잡아주고 싶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윤희에게>


이력서를 든 채 지원할 식당의 대문 앞에 서 있는 윤희의 모습이 담긴 마지막 장면은 이 영화의 끝인사로 제격이다. 이력서는 일종의 미래로 보내는 편지이고 <윤희에게>는 정확히 뒤가 아닌 앞을 바라보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것만 찍기 때문에 인물은 찍지 않았던 새봄이 긴장한 엄마를 향해 카메라를 들자 윤희가 웃는다. 겨울의 윤희가 이제 새봄을 맞이한다.                 





[chaeyooe_cinema]

윤희에게 Moonlit Winter

감독 임대형


가본 적 없는 도시와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애타는 마음을 품게 하는
눈의 영화, 달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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