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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eyooe Nov 13. 2019

우리 정말 사랑하긴 했을까 말할 수가 없잖아

<모리스>를 보고


두 영국 청년 모리스 홀(제임스 윌비)과 클라이브 더햄(휴 그랜트)이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을 사랑이라 명명하면 맞춤할 것 같지만 야속하게도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 말들로 더 자주 불린다.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그 감정은 풍기 문란죄로 정의되며 당사자들에게조차 남부끄러운 일, 가장 나쁜 죄악, 끔찍한 저주, 해괴한 것으로 일컬어진다.      


<모리스>의 시간적 배경은 20세기 초(1909년~1913년)다. 이 시기의 영국은 대략 70년 전인 1845년, 자국의 남성 작가 오스카 와일드에게 ‘남성들과 외설 행위를 했다는 죄목으로 법적 최고형인 2년간의 강제 노역형을 선고(장정일, 오스카 와일드의 ‘심연으로부터’, 한국일보)’했던 그때와 생각 차이가 없다. 영국뿐만 아니라 당시 유럽 전역에서 동성애는 사회적 금기였다. 모리스와 클라이브의 사랑에 이름을 붙일 수 없었던 이유다.


출처 = 네이버 영화 <모리스>


누군가에겐 친숙할 그 이름

제임스 아이보리가 1987년에 연출한 <모리스>가 지난 11월 7일 국내에 정식으로 개봉했다. 이 영화가 32년 만에 한국 극장에 걸릴 수 있었던 이유를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을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감독의 이름을 읽자마자 눈치챘을 것이다.


제임스 아이보리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각본가이자 제작자이며 무엇보다 이 영화로 아카데미 각색상을 받은 각색가이다. 그가 시나리오로 옮긴 원작은 안드레 애치먼이 쓴 동명의 소설(우리나라에서는 「그해, 여름 손님」 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었다)이다. <모리스> 역시 원작 소설이 있는데 E.M 포스터가 쓴 동명의 소설이 그것이다. 제임스 아이보리는 시나리오 작가 킷 헤스케스 하비와 함께 <모리스>의 각본을 집필했다.


출처 = 씨네21 <모리스>


불붙인 쪽보다 불붙은 쪽이 더

생명 탄생의 경이로움과 아내를 지켜주어야 한다는 남편의 덕목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자란 모리스가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해 사랑하는 상대는 뜻밖에도 동성의 1년 선배 클라이브다. 두 미인 중 이 금지된 사랑의 유혹자는 분명 클라이브지만 더 맹렬하게 달려드는 건 걸려든 쪽인 모리스다.      


클라이브의 사랑 고백에 헛소리라 받아쳤던 모리스는 그날 밤 클라이브의 방 창문을 넘어 들어와 그에게 키스를 바치는 것으로 성급했던 지난 대답을 반성한다. 강의도 빼먹고 클라이브와 풀숲에 누워 한낮의 밀회를 즐기는 모리스에게서 그래도 미풍양속은 지켜야 한다며 수줍게 소신을 밝히던 교외 청년의 얼굴은 더는 찾을 수 없다.

    

출처 = IMDb <Maurice>


직면하는 모리스와 돌아서는 클라이브

은근한 연인은 찾아온 사랑을 대접하는 방식에서 차이를 보인다. 사회 진출과 결혼이 필수 포함된 생애 주기를 살며 두 사람은 서로 동상이몽을 한다. 모리스는 이 사랑을 인정한다. 그래서 보호하려 한다. 무단결석에 대한 반성문을 써내라는 학과장의 일성에 그는 밀회를 대신할 변명거리를 만드는 대신 대학을 자퇴하는 무모한 행동을 벌인다. 고향으로 돌아간 모리스는 아버지와 같은 증권 중개인이 되어 클라이브와의 친밀한 관계를 이어 나간다.      


그런 사랑이 있다고 인정하기에 모리스는 그것에 저항도 해본다. 의사에게 찾아가 이게 병이라면 치료받고 싶다고 한탄하기도 하고 최면 상담을 받기도 한다. 몇 차례 몸부림 끝에 그는 자신에게 두 번째로 찾아온 사랑 앞에 무릎을 꿇고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출처 = 씨네21 <모리스>


반면에 클라이브는 모리스를 사랑하지만 사랑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법조인이 된 뒤 정계 진출이라는 명확한 목표가 있는 그에게 동성애는 치명타다. 사회가 규정한 ‘정상성’의 범주에서 이탈할 자신이 그에겐 없다. 그래서 클라이브는 명예가 무슨 소용이며 너만이 나의 사랑이라고 말한 모리스 앞에서 천연덕스레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사랑을 하게 된다면 그 대상은 멋진 여자일 거야.” 그 어떤 단도직입적인 이별 선언보다 잔인한 한 마디다. 그리고 머지않아 클라이브는 상상한 대로 앤 우드라는 멋진 여자와 결혼한다.      


출처 = IMDb <Maurice>


도저히 잊히지 않는다

<모리스>의 엔딩을 장식하는 사람은 뜻밖에도 모리스가 아닌 클라이브다. 이 장면에서 클라이브는 창밖을 바라보며 아주 모호한 표정을 짓는데 이 장면 바로 직전에 삽입된 장면 때문에 관객들은 오만 가지 생각에 빠진다. 아마도 클라이브가 그런 표정을 짓는 데에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을 그 장면은 케임브리지 시절 빨리 나오라며 소리치며 손짓하는 모리스가 전부다.      


불과 몇 시간 전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며 찾아온 모리스에게 또다시 그 사랑을 부정하는 말들을 쏟아냈었던 클라이브다. 지금 그의 창밖은 어두운 밤이고 아무도 없지만 그의 곁에는 자신의 어깨에 다정히 머리를 기대고 선 아내가 있다. 클라이브는 잠시 옛 생각에 잠긴 걸까, 아니면 혹여 내 사랑에 용기 내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는 중일까. 도통 알 수 없는 와중에 자꾸 스탕달 소설의 한 문장이 머릿속에 맴돈다. "제가 가장 행복을 느끼는 자리에 머물러 있겠어요."(「아르망스」)     





[chaeyooe_cinema]

모리스 Maurice

감독 제임스 아이보리 James Ivory



"제가 가장 행복을 느끼는 자리에 머물러 있겠어요." (「아르망스」, 스탕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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