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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terson Jul 01. 2019

우디의 선택이 의미하는 바는

‘토이스토리4’를 보고

*스포있음


“나도 내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모르겠어”

영화 말미에 “왜 내가 살아 움직이는 거지?”라고 놀라는 일회용 나이프의 질문에 대한 포크 숟가락 포키의 답이다. 우리의 존재 목적은 시간이 흐르면서 사라지기도 하고 변하기도 하며 때론 새로 설정되기도 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이 대사는 ‘토이스토리4’가 얘기하고자 하는 주제를 정확히 관통하고 있다. 또 이는 픽사가 앞으로 토이스토리라는 작고 거대한 장난감들의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그려나갈지에 대한 블루프린트이기도 하다.

영화는 보니라는 아이로부터 더 이상 사랑받지 못하고 있는 우디로부터 시작한다. 주인 보니에게 있어 현재 최고의 장난감은 다름 아닌 제시다. 또 우디는 장난감들 사이에서도 리더로서의 입지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 전 주인 앤디의 방으로부터 새로 이사 온 보니의 방에는 돌리라는 인형이 리더의 역할을 잘 수행해내고 있다. 최애 장난감으로써, 장난감들 사이 리더로서 설 자리를 잃은 우디는 만년 옷장 안 신세다.

그런 우디 앞에 포키라는 새로운 장난감이 나타난다. 정확히 말하자면 포키는 보니가 유치원에서 버려진 일회용 포크 숟가락을 재활용해 만든 장난감이다. 장난감으로 태어난 게 아닌, 만들어진 존재다. 어찌 됐든 포키는 보니에게 최고의 장난감이 된다. 하지만 장난감으로써 생명을 얻은 포키는 자신의 당초 존재 목적인 일회용 포크 숟가락으로써의 역할을 다했음에 쓰레기통으로 버려지려 한다. 우디는 그런 포키에게 집착하며 버려지려는 그의 행동을 저지한다. 보니에게 가장 소중한 포키를 지킴으로써 자신의 존재 가치를 보니로부터 인정받고 싶기 때문이다. 우디가 우연히 포키와 함께 보니의 품에서 잠들게 되는 장면은 포키를 통해 자신도 다시 사랑받을 수 있음을 믿고 싶은 우디의 안타까운 모습이다.

영화는 포키와 우디를 통해 ‘장난감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으로 극을 시작한다. 장난감으로 태어났지만 더 이상 장난감으로써 기능하지 못한다면? 장난감으로 태어나지 않았지만 장난감으로써 기능한다면? 이미 이 장난감들을 주인공으로 세 편의 영화를 낸 시점에 다시금 던지는 이 질문은 상당히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픽사는 이번 토이스토리4를 통해 장난감에 대해 새롭게 재정의하고 그 세계를 더욱 확장해 나가고자 한다.

지금까지 토이스토리 시리즈에서의 장난감은 말 그대로 아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장난감이었다. 그러니까 포키와 같이 장난감이 아니었던 사물이 재활용돼 만들어진 장난감은 장난감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우디와 포키 사이에서 보니에게 누가 더 장난감으로써 기능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본다면 진짜 장난감인 우디가 아닌 단연 포키일 것이다. 즉 픽사가 토이스토리4를 통해 새롭게 정의하고자 하는 장난감은 아이가 즐겁게 가지고 놀 수 있는 모든 사물이 되는 셈이다.

이 장난감 의미의 확장이 가리키는 바는 무엇일까. 새로운 세계로의 출발은 구시대와의 이별을 의미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토이스토리는 굉장히 보수적인 시리즈였다. 장난감을 주인공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한 가지 전제해야 하는 상황이 있다. 바로 장난감의 주인은 아이들이란 것이다. 아이와 장난감 사이에서 권력은 늘 아이에게 있을 수밖에 없다. 장난감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들의 존재 목적은 아이로부터의 사랑뿐이다. 1,2,3편을 생각해보면 모두 공간만 달라졌을 뿐 결국 집(주인)으로의 귀환을 다루고 있다. 집에 있을 때 그들은 가장 소중하고 안전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관계의 보수성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그와 길을 달리 한다. 저마다 주어진 운명을 거스르고 자신의 삶의 목적을 새롭게 정의해 나간다. 당초 존재 목적이었던 일회용 포크 숟가락으로써 운명을 다 한 포키는 쓰레기라며 버려지길 원했지만, 그는 어느 순간 보니의 최애 장난감으로 제2의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이는 최근 난민 문제를 비롯한 수많은 차별에 대한 얘기로도 볼 수 있다. 외부의 존재가 우리 내부로 들어왔을 때 과연 사회는 어떻게 기능해야 하는가를 생각해볼 수도 있다. 우디도 마찬가지다. 더 이상 기존의 장난감으로써 기능하지 못하게 된 우디는 수년 만에 재회한 보와 세상을 여행하기로 결심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이의 손을 떠난 장난감이 되는 셈이다.

우디의 퇴장은 단순히 그간 보수적이었던 장난감 속성으로부터의 탈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의 퇴장은 현시대가 직면한 수많은 변화를 담고 있기도 하다. 대표적인 게 페미니즘일 것이다. 이미 우린 보를 통해 페미니즘을 자연스레 떠올릴 수밖에 없다. 보는 자신의 상징물이었던 아름답지만 움직이기에 불편했던 치마와 스탠드를 버리고, 지저분하지만 자유로울 수 있는 바지와 스컹크 자동차를 이용한다. 또한 그녀와 늘 함께였던 세 마리 양들이 암컷이었고 각자의 이름이 있다는 것을 우디를 비롯한 우린 새롭게 알게 됐다.

또 우디는 이미 그 자체만으로도 보수적인 캐릭터이기도 했다. 우디는 당초 보안관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캐릭터다. 보안관은 미국 개척시대에 있어 철저히 남성 위주의 권력 사회를 대표하는 캐릭터다. 그런 그가 자신의 권력을 상징하는 배지와 목소리를 여성 캐릭터인 제시와 개비에게 넘겨준다는 점 또한 꽤나 상징적이라 할 수 있다.

1995년 앤디라는 소년의 방에서 시작된 이 장난감들의 이야기는 2019년 보니라는 소녀의 방으로 옮겨지면서 시대의 흐름과 변화를 받아들였다. “to infinity and beyond”라는 대사로 시작한 이 장난감들의 이야기는 같은 대사로 매듭지어진다. 1편에서의 대사가 당시 첫 3D 애니메이션을 선보인 픽사의 포부를 담았다고 한다면, 이번 4편은 새로운 세상을 향한 아름다운 투쟁의 목소리로 들린다. 당초 자신의 존재 목적이 불분명해지거나 사라지게 됐을 때 우리는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까. 토이스토리는 말한다. 새로운 변화를 두려워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그러다 보면 새로운 방향 설정이 이루어질 거라고. to infinity and beyo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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