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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말록 Dec 20. 2017

연기법과 생각의 틀

세상은 사실 요렇게 두부처럼 생겼습니다. 비유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 구조는 이런 모양으로 생겼습니다. 두부를 자르는 <두부 틀>처럼 말입니다.

이 틀의 각각의 칸을 <개념> 혹은 <관념>이라고 합니다. 편의상 개념이나 관념(생각)을 <개념>으로 부르겠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생각이란 틀로 세상을 분절된 모습으로 잘라냅니다. 그래서 개념의 단위들을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착각하며 세상을 살아갑니다.  

생각은 언어화된 개념들과 이미지, 그리고 기억과 믿음들을 포함합니다.


두부판은 틀로 잘라지지만 실상은 결코 잘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그 개념들을 <잘라져 있는 것> 또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인식합니다. 물론 그 근거는 모양과 용도에 따른 구분이니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드러나기 위해서는 이렇게 이원적으로 분리되어야만 합니다. 인식되지 않는 것이 있어야 인식되는 것이 인식될 수 있죠. 이것은 개념으로도 그렇지만 현상 세계에서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예를 들어 길다는 개념이 없이는 짧은 막대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짧은 막대 자체를 개념 없이 인식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막대는 그것과 비교되는 막대 아닌 것들이 없이는 막대로 인식되지 못합니다. 드러날 수 없는 것이죠. 막대가 아닌 공간들이 배경처럼 둘러쌓아야만 인식이 가능합니다. 인식되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생각 속의 일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인식을 거치지 않고 존재성을 부여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 분절된 개념을 예를 들어볼까요? 우리가 흔하게 보는 이런 사과 역시 개념입니다.

멀쩡히 볼 수 있고 만질 수도 있고 심지어는 먹을 수도 있는 이 사과가 바로 우리의 생각이 만들어낸 개념입니다. 처음에는 눈앞의 사과가 개념이라는 말이 매우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눈앞의 사과는 개념입니다. 인식하는 다른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개념으로 사물을 보고 있는지 스스로 확인하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대상을 바라볼 때  어떤 느낌이 드는지 확인해보세요. 사과가 개별적이고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느낌이 든다면, 그것이 바로 개념으로 사물을 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두부 자르는 틀을 휘둘러 사과라는 개념으로 싹둑 잘라낸 것입니다. 개념의 막을 씌워서 보고 있으므로 이 사과는 개념인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 의식이 바로 이런 상태입니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관념을 바로 <이원적 실체적 존재관념>이라고 합니다. 공부하면서 자주 듣는 이 말은 알고 보면 참 재미있는 용어입니다. <족발>처럼 모든 단어가 동어 반복이니까요.  


이원적=실체적=존재 관념


이원성이란 말은 숫자 2의 의미 때문에 처음에는 <음><양>과 같은 <상대적 대극>만을 떠올리지만 사실 <이원성>은 <나뉨>을 의미합니다. 열 개로 나뉘든 스무 개로 나뉘든 같은 <이원성>입니다. 그래서 <다원성>은 <이원성>의 반대 개념이 아니라 또 다른 이원성일 뿐입니다. <이원성>이 아닌 것을 <비이원성>이라고 합니다. <이원성>이 아닌 것을 <일원성>이라고 하지 않고 굳이 <비이원성>이라고 하는 이유는 <일원성>을 또다시 실체 시 할까 하는 노파심 때문입니다.

우리는 스스로가 만들어 뒤집어쓴 이 이원성, 실체감, 존재 관념이 바로 허상임을 바로보기 위해 연기법을 공부합니다. 이원성, 실체감, 존재 관념의 근본은 바로 <두부 틀>입니다. 연기법 공부는 이 <두부 틀>을 효과적으로 녹이고 온전한 실상을 드러내 줍니다.


보통 깨어남을 공부하는 방법이 심법 위주인 경우가 많은데, 그에 비해 이 연기법은 조금 특별합니다. 왜냐하면 이원성을 벗어나는 도구로 이원성이라는 생각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벗어나기 위한 공부를 생각으로 한다? 조금 이상하죠. 맞아요. 조금 이상합니다. 분별하지 말라는 것이 어찌 보면 깨어나기 위한 가르침의 핵심인 것 같은데 연기법은 적극 적으로 연기적 사유를 하라고 하니까요. 언뜻 생각하면 이렇게 분별에 빠져서 헤어나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몸에 박힌 가시를 다른 가시를 이용해 빼내는 것과 같습니다.


깨달음은 이원성을 포함하고 넘어섭니다. 그래서 깨닫는 것은 이원적 사고가 발달한 인간만 가능하고 인간에게만 필요한 것입니다. 간혹 이성적 사고가 발달하기 이전의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 것이 깨어남으로 잘 못 알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이원적 분화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깨달음이 아닙니다. 깨닫는 다고 이원적 분별이 무력화되는 것이 아님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발달 장애나 치매에 걸려 어린아이와 같이 됐다고 깨달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깨어난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혼란의 과정을 격기는 하지만 이원적 분별 능력을 잃어버리지는 않습니다. 이것을 영성 천재 켄 윌버는 전초오류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혹시 켄 윌버를 모르신다면, 그의 책 '무경계' 일독을 권합니다) 즉, 이원적 분화 이전의 어린 시절과 깨달음 이후의 상태를 겉보기 비슷하다고 해서 같은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 오류라고 말합니다.


연기법은 바로 <두부 틀>을 녹이고 실상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 어떻게 보면 연기법적인 접근이 이성적 인간의 깨어남에 매우 잘 맞는다는 점은 쉽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연기법을 공부하는 분들이 많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연기법을 통해서 깨어난 분들도 많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불법을 연기법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불교에서 조차 연기법은 일종의 교학으로써만 머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정도의 연기법 설명으로 지나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히려 깨치고 나서 연기법의 의미를 제대로 알게 되는 경우는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방법적으로 연기법이 효용이 없어서는 아닌 것 같고 단지 제대로 공부를 하는 분이 소수이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래의 내용은 연기법 공부를 하면서 마주하게 되는 의문을 풀은 내용인데, 연기법이 처음이라면 굳이 읽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실 어려운 공부가 아니지만 세부적으로 풀다보니 자칫 어렵다는 선입견을 갖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연기법을 어느 정도 알고 계시다면 꼭 끝까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Q. 태양이 사라지면 사과는 없는데 사과가 사라지면 태양은 왜 그대로 남아있을까?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면 태양도 사라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두부와 두부틀의 비유를 유심히 확인하셨다면, 질문에 등장하는 모든 단어들이 개념이라는 사실이 보이기 시작하실 겁니다. 농부와 땅, 영양분, 햇빛이 <두부 틀>에 의해 분절된 개념이 유지된 상태로 의문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런 이원적 실체감 상태에선 햇빛 속에 사과가 들어가는 일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요. 그러나 처음 공부하는 과정에서는 이미 <분절>된 생각 구조를 갖고 있으니 실체감이 남아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런 질문이 떠오를 때, “아, 내가 아직 이원적 실체적 존재 관념, 즉 <두부 틀>로 단어들을 인식하고 있구나~”라고 의식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을 저는 바른 준비운동이라고 합니다. 연기맵이나 연기사유를 할 때도 마찬가지로 아주 좋은 준비운동이 됩니다. 스스로의 <두부 틀>을 자각하는 연습을 통해서 그것을 벗어날 발판을 단단히 마련하는 것입니다.

질문이 스스로 깔아놓은 개념의 지뢰로 덮여있음을 충분히 자각한 후, 연기맵을 통해서 1번 질문을 이해해 보겠습니다.  

글씨는 못생겼지만 제가 아끼는 사과 연기맵입니다.^^


태양이 등장합니다. 이 태양은 우리의 개념으로 인해 언제나 하늘에 둥둥 떠있습니다. 이렇게 둥둥 떠있는 태양과 눈앞에 있는 사과를 가지고 서로가 말미암아 생겼다는 <상호의존>을 이해하려 하면 태양 > 사과로는 어렵지 않지만 그 반대인 사과 > 태양은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사과 때문에 태양이 생겼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무엇이 잘못됐을까요?

시간 순방향(순행)은 이해가 쉬운데 역행이 문제라면 순행 역시 연기법과는 거리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시간에 기대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시간 개념이 등판하면 이렇게 <인과법>으로 흘러버립니다. 인과법은 시간의 흐름상에서 원인과 결과가 따로 분리됩니다. 원인과 결과를 다르게 본다고 해서 <인과이시>라고도 합니다. <두부 틀>이 살아있는 상태입니다.

참고로, 시간 개념을 먼저 떼어내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연기법 공부 과정에서 실체적 존재 관념이 사라지면 시간과 공간 개념은 자연히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시간 역시 <두부 틀>과 같이 우리의 생각으로 지어낸 개념이니, <두부 판>이 드러나면 자연이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서, 지금 연기맵에 등장한 태양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사과를 가운데 그려 놓고 태양을 밖으로 빼놨으니 마치 태양과 사과가 따로 떨어진 것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사실 이 연기맵은 원인과 조건으로 그려 넣은 모든 원인.조건이 그대로 사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회에서 두 번째 연기맵을 그릴 때는 사과 안에 넣어서 그리는 연습도 병행합니다.

태양은 바로 사과 안에 들어있습니다. 비단 사과 안에만 들어있는 게 아니라 여기저기 모든 곳에 태양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제인 사과만 놓고 보면 태양은 분명 사과에 들어있습니다. 자, 그러면 사과라는 개념과 태양이라는 개념은 드디어 <상호의존>하게 되었습니다. 사과가 사라지면 태양이 사라집니다. 태양이 사라지면 마찬가지로 사과가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태양>과 다른 모든 원인.조건이 그대로 사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연기법의 핵심은 그 자체의 고유한 성품이 없음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가 목적지가 아닙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연기법은 그것에 그것이라 할 고유한 성품, 자체성, 존재성이 없음을 보는 것입니다. 요소론적으로 구성요소를 파악하는 것이 아닌, 그것 자체의 본질이 무엇이길래 우리가 그런 개념을 갖게 되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결국 그 개념이 헛것이었음을 보는 것이고, 이렇게 이원적 생각 혹은 개념이 허상임을 보는 것입니다. 그 개념이 사라지고 남는 눈 앞의 그림은 그전에 보던 그림과는 달라집니다. 다를 수밖에 없죠. 태어나서 처음으로 TV를 보는 사람은 박스 안에 진짜 사람이 들어있다고 믿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그렇습니다. 


사과가 눈 앞에 있는데, 만질 수도 있고 먹을 수도 있는 이 사과가 연기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나'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나'도 연기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사과의 고유한 존재성이 없고 '나'의 고유한 존재성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꿈과 같고 환상과 같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인식은 되는데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꿈속에서 처럼 보이고 만져지지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연기법이 알려주는 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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