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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말록 Oct 20. 2017

명상

명상이라고 하면 흔히 가부좌를 틀고 허리를 곧게 펴고 눈을 감은 모습이 떠오른다. 공간은 조용해야 하며 두툼한 방석에 앉아서 몇 시간이고 움직이지 않고 마음이 세계를 탐험하는 신비로운 이미지가 생각난다. 절에서는 참선이란 것을 하고 남방불교에서는 위빠사나라는 형태로 수행하며 서양 종교에서는 묵상이라는 것을 하듯이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종류의 명상이 이루어지지만 어차피 입 다물고 눈감고 허리 펴고 조용히 앉은 모습은 차이가 없어 보이니 보통은 '명상'이라는 말로 통칭한다. 요즘은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한다거나 힐링에 관심이 많아져서 더욱 명상에 관심을 많이 갖는 듯하다. 요즘처럼 사회가 복잡하고 변화가 빠르게 진행될수록 탈출구를 찾으려는 노력은 자연스럽다.


이런 명상은 모습들은 비슷하지만 내용은 사뭇 다르다. 수행터마다 종교마다 혹은 단체마다 그 목표와 방법이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크게는 두 가지로 분류된다. 하나는 한 가지 대상에 의식을 집중해 생각을 물리치고 의식을 깊게 파고 들어가는 집중 명상이고, 다른 하나는 알아차림 명상이다. 


집중명상은 생각을 물리치고 조용한 의식상태를 유지해서 의식의 근원에 닿으려는 방식인데 이것은 불교의 심법적 수행과 맥락이 갖다. 이원적 생각이 진실을 가리니 그 생각 이전을 보려는 시도다. '생각'은 언제나 찬밥신세다. 우리의 삶도 일어나는 생각과 동일시되는 습관으로 인해 스스로 고통을 자초하고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여긴다. 생각은 그만큼 현실을 왜곡하는 주범이라고 인식한다. 불교에서도 생각을 분별 망상 혹은 경계라 하여 금기시한다. 생각 자체가 이원성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생기는 근원적인 오류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명상법인 알아차림 명상은 최근 점점 인구가 늘어나고 있는 남방불교의 위빠사나와 서양의 mindfulness를 말한다. 매 순간 호흡이나 감촉 혹은 소리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한다. 이 관찰의 방법이 좋은 것은 집중명상과는 달리 일상에서도 가능하다는 점이다. 관찰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알고자 하는 것은 존재의 실상, 즉 매 순간 생멸을 통해 우리가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이것이 도대체 뭔지 스스로 알아가는 과정이다. 물론 알아차림에도 집중은 필요해서 집중명상과는 다른 각성에서 오는 편안함, 좋은 느낌이 동반된다. 


나의 명상은 이런 관찰 명상을 기본으로 한다. 하지만 생멸을 보는 것과는 조금 다르게 연기적 관찰을 목표로 한다. 개인적으로는 위빠사나의 궁극적 목적도 연기를 관하는 것이 맞다고 보지만 실제로 연기관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것 같다. 

어쨌든, 연기적 관찰을 목적으로 하다 보니 의식이 몽롱한 상태로 빠지거나 어떤 다른 의식의 상태로 변성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형식이나 시간적 장소적 제약이 없다. TV를 보다가도 명상을 할 수 있고 버스를 타고 가면서도 할 수 있으며 친구를 기다리다가도 할 수 있다. 따로 장비도 필요 없고 형식도 필요 없으니 언제 어디서나 마음 내키는 대로 꺼내서 쓸 수 있는 아주 훌륭한 도구다. 남들이 시간만 나면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열어보듯이, 나는 시간만 나면 명상을 꺼내 든다. 기다리는 것이 지루하지 않은 탓에 약속시간이 1시간이 넘게 늦게 나타나는 친구도 반갑기만 하다. 명상뿐만 아니라 명상의 주제도 사방에 널려있다. 시끄러운 소음도 명상의 주제가 되고 조용한 침묵도 좋은 주제가 된다. 소리가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다. 있으면 있는 대로 쓰고 없으면 없는 대로 쓴다. 


혹자는 집중명상을 통해서 생각을 없애고 근원으로 몰입해야 하지 않느냐고 궁금해하지만, 사실 생각은 아무 문제가 없다. 앞서 생각 자체가 근원적인 이원성의 오류가 있다고 지적했지만 이것은 사실 매우 자연스러운 인간의 생리작용과 같다. 우리가 배고플 때 배고프고 졸릴 때 졸린 것을 거부할 수 없듯이 생각은 그저 일어나도록 되어있는 것이다. 물론 집중명상을 통해서 생각을 안 할 수는 있다. 그러나 평생 명상 상태에서 살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석가모니가 6년의 고행과 깊은 삼매를 포기한 것도 이와 비슷한 이유다. 생각에 빠져서 허우적거리 거나 생각과 '나'를 동일시하는 것이 문제지 생각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연기적 관찰의 대상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이다. 나의 호흡, 앞을 지나가는 버스, 멀리서 들리는 경적 소리, 키보드를 두드리는 촉감, 혀를 자극하는 포도즙의 달콤함, 문득 떠오르는 두려움, 즐거움, 고통, 슬픔, 하늘, 구름, 바람... 등등 내 안팎을 둘러싼 모든 것이 주제다. 그러니 TV가 켜있건 주위에서 떠들건 방석이 있건 없건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 생각을 피할 이유도 없다. 생각을 이용해서 결국 생각을 벗어나게 되니 처음에는 사고 능력을 적극 이용해야 한다. 관찰은 동시다발적이 아닌 하나씩 개별적으로 진행한다. 


관찰을 하고 있으면 마음이 가라앉고 그 속에서 의식은 더욱 또렷해진다. 몽롱해지거나 잠재의식으로 빠지는 것과는 다르다.  예를 들어 멀리서 들리는 경적소리를 들었다고 하면, 이 소리는 불러일으킨 모든 원인과 조건들을 떠올린다. 생각은 말이 아니라 이미지로 한다. 운전기사 아저씨, 경적을 누르는 손, 경적을 울리게 만드는 교통상황, 경적을 만드는 제조사, 배터리, 소리의 울림을 전달하는 공기 등등, 무수히 많은 원인과 조건들은 끝이 없다. 이들 중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면 '이 소리'는 다른 소리가 되거나 발생하지 않게 된다. 이런 생각을 확장하다 보면 실상에 대한 큰 힌트를 얻게 된다. 각성과 함께 새로운 지혜가 발현되는 것이다. 이 단순한 방법이 연기법 사유 수행이자 나의 명상이다. 단순한 것 같지만 이것이 바로 석가모니를 깨달음으로 이끈 연기적 관찰 명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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