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말록 Jan 15. 2018

꿈,환상,물거품,이슬과 같고...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금강경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저 처럼 한자를 잘 모르면, 언뜻 보아 대단히 어려운 말 같지만, 그냥 모든 것이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이슬과 같고 거품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설명하면서 흔히들, 모든 것이 때가 되면 사라지는 허무한 것이니 집착하지 말라는 의미로 쓰는 것을 자주 봅니다. 금강경이 그다지 친절한 경전은 아니라서 어찌 보면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당연하기도 합니다만 사실은 얘기가 좀 다릅니다. '연기'에 대한 설명이 누락된 결과입니다.

금강경에서 꿈, 환상, 이슬, 번개와 같은 표현은 비유에 불과해요. 그래서 의미 그대로 받아들이면 자칫 '지속이 되지는 않지만 짧은 순간 동안은 존재하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이원적 의식 속에서는 여전히 꿈이란 것이 존재하고 이슬이란 것이 존재하고 번개 또한 찰나에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연기법이 말하는 핵심은 바로 '그러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입니다. 여기서 그러한 것이란 나를 포함한 현상세계의 모든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인식으로는 인식되지만 그것이 단 한 순간도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청천벽력 같은 가르침이 바로 연기법이고, 금강경에서는 그에 대한 결론적인 내용을 꿈,환상, 이슬, 번개와 같다고 비유를 들어 설명하는 것입니다.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인식되지 않는다는 말과는 다릅니다. 우리의 의식은 존재와 인식하는 것을 동일하게 생각하지만 사실 둘은 매우 다르지요. 이것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눈에 보이고 만져지지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아니 눈에 보이고 만져지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아이러니를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바로 연기법으로 보고 이해하면 됩니다.

우선 존재라는 것이 성립하기 위해서 '주어'가 필요합니다. 즉, 무엇이 존재한다고 할 때 '무엇'이 필요조건입니다. 그런데 연기법을 통해 그 '무엇'이 우리의 피상적인 생각과는 달리 허깨비와 같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왜냐하면 박수 소리 처럼 손과 손이 마주쳐(인연) 다른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만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이런 박수소리는 있는것인가요 없는 것인가요? 소리가 들리는 동안은 있는것인가요? 그렇다면 무엇이 있는 건가요? 소리의 파동이 있는 건가요? 이렇게 본질에 대해서 사유하다 보면 그동안 알고 있던 그 '무엇'이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진실을 마주하게 되는것이 연기법 공부의 과정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지속적으로 대상의 본질이 무엇인지 살펴보며 깨어있는 것 뿐입니다. 우리가 사과라는 존재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사과'가 정말 무엇인지 진지하게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것 아닌 것들에 의지해서 생겨난 사과는 정말로 나의 생각처럼 그런 '사과'인가 확인해보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다 보면 결국 세상의 모든 존재, 아니 존재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모두 허깨비와 같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존재하지 않으면서 모양은 관찰되기 때문에 허깨비라고 부르는 것이죠. 이때 누군가는 반문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허깨비에 의해서 당신의 삶이 영향을 받는 것이니 허깨비라 해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라고요. 무시할 수 없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영향을 받기 때문에 무시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허깨비에 의해서 우리의 삶은 영향을 받습니다. 그런데 사실 알고 보면 우리의 삶 또한 그와 같은 허깨비에 불과합니다. 그 와중에 '나'라는 생각 또한 실체가 없는 허구적인 사실이 드러납니다.

결국 우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것들, '나'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모두 연기된 것이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어째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눈앞에 나타나고 생겼다가 사라질까 궁금하시죠? 그것은 일단 우리의 이원적인 관념이 사라지고 난 후에는 그 자체가 실상의 모습이라는 깨달음과 함께 질문이 사라집니다. 진짜 '나'에게는 질문이 없습니다. 당연하지요. 질문과 답, 그리고 '나'가 모두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깨달았건 깨닫지 못했건 이러한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 함께 읽는 글 : 


작가의 이전글 연기법과 생각의 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