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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말록 Apr 05. 2020

관점의 정당성

40대 중반의 강봉구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아내에게서 남편이라 불리고, 딸에게는 다정하고 든든한 아빠로 불린다. 어머니에게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둘째 아들이고 회사 직원들에게는 성격이 까탈스러운 본부장이다. 부하직원들에게는 근엄한 상사로 보이지만 반면에 대표에게는 나이만 먹고 밥벌이 못하는 명퇴 1순위 골치 아픈 임원이다. 강봉구는 과연 누구인가? 어떤 것이 강봉구의 고유한 존재성인가? 강봉구는 과연 존재하는가?


나는 이 짧은 법문을 참 여러번 들었다. 그러나 단 한번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법문은 귀를 향해 들어오지만 그것은 결코 제대로 전달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지나고보니 그랬다. 왜 그랬을까? 


맨 처음 이 법문을 들었을때 내 머릿속에 들었던 생각은 이랬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도 비슷하리라…)

사회적 역할에 따라서 강봉구가 다르게 불리고 다르게 평가 받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너무나 당연해서 여기서 뭘 깨달아야할지 모르겠다. 이 당연한 이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환경에 따라서 다른 사람들에게 다르게 불린다고 해도 ‘나’가 바뀌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나는 그대로인데 다른 사람들이 나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다른 이름으로 대하는 것일뿐, 여기에 무슨 특별한 드라마가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강봉구는 그저 강봉구일 뿐인데 사회적 위치와 역할에 따라서 다르게 불리는 것 뿐이다. 


이 생각의 오류를 깨닫는데 3년이 걸렸다. 지나고 보니 왜 핵심을 파악하지 못했는지 이유를 알게 됐다. 여러분들도 위의 설명에서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면 당시의 나와 같이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이유는 정말 간단하다. 

저 밖에 객관적인 강봉구라는 사람이 고정적으로 존재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고정적으로 존재하는 강봉구를 다른 사람들이 다른 입장에서 보고 이름을 붙일 뿐이라고 믿는다. 그 믿음에 따른 관념이 선행해 있고 그에 맞춰서 이야기를 받아들였으므로 아무 감흥 없이 자연스러웠던 것이다. 


강봉구는 누구의 관점이냐에 따라 변한다. 관점이 바뀌면서 강봉구는 계속 바뀐다. 아빠, 남편, 직원 등등…이것은 강봉구가 바뀐게 아니라 보는 관점이 바뀐것 뿐이라고 믿는다. 일단 그렇다고 치자. 그러면 도대체 변하지 않는 객관적인 강봉구는 무엇일까? 그러면 강봉구가 나서서 말할 것이다. 내가 바로 변하지 않는 객관적인 강봉구라고. 


여러분은 이 말에 동의할 수 있는가? 


사실은 강봉구가 바라보는 자신, 강봉구 역시 강봉구의 관점일 뿐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 모든 다른 사람들의 관점과 마찬가지로 단지 하나의 관점일 뿐인 것이다. 강봉구의 관점이 아내의 관점 보다 우선하여 객관적인 기준점이 될 수 있는 당위성은 어디에도 없다. 강봉구가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는 제외하고라도: 이 또한 강봉구라는 고정된 무엇을 상정한 말이긴 하다) 스스로 고정적이라고 믿는 것은 그의 관점이 ‘강봉구 관점’에만 머물렀기 때문이다. 


강봉구가 강봉구의 관점을 벗어나면 무슨일이 벌어질까. 


관점에 관한 또 다른 얘기가 있다. 

어느날 광장에 커다란 삼각뿔 조형물이 세워졌다. 그 주위로 몇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조형물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밑이 평평한 삼각형의 모양으로 묘사하는 사람도 있고 밑이 뾰족한 삼각형을 묘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각자의 묘사가 모두 다르게 보인다는 사실을 알게되고 사람들은 당황했다. 분명 동일한 대상을 바라보는데 왜 다르게 보일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무리 중 영리한 한 사람이 먼저 그 이유를 찾아내고 정리하기 시작한다.


“그건 우리의 위치에 따라서 모양이 다르게 보이는 거야. 그래서 진짜 삼각뿔의 모습은 한쪽에서만 바라본 모습이 아니라 우리가 빙글 돌아가며 전체를 봐야 삼각뿔의 진짜 모습을 파악할 수 있어. 물론 위에서 본 모습도 포함시켜야지. 이런건 3차원 공간에서 벌어지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야” 


그도 물론 왜 3차원에서는 위치에 따라서 사물이 다르게 보이는지는 몰랐지만 경험을 통해 패턴을 찾아냈고 그것을 정리해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삼각뿔의 위치에 따른 다양한 모습에 대해서 정의를 내렸다. 정면에서 볼때의 모습과 옆에서 볼 때의 모습 그리고 위에서 볼 경우의 모양을 정의 내렸다. 이 개념을 토대로 당장 눈앞에서는 삼각형이나 원의 모습만 보이더라도 삼각뿔을 유추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삼각뿔의 공통적인 관념이 생성됐다. 이 관념에 의해서 삼각뿔의 객관적인 모양이 공인됐으며 그와 함께 이 삼각뿔의 객관적인 존재성도 함께 공인됐고 현장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의 증언들이 사실임을 뒷받침했다. 그런데 이때 누군가가 불쑥 끼어들었다. 


“나는 반댈세. 여러분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어. 나에게 이것은 단지 둥글둥글한 모양으로 보일 뿐, 당신들이 묘사한 그런 날카롭고 뾰족한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는단 말이야.”  


이 사람은 시력이 매우 퇴화된 사람으로서 여기서는 일명 특이한 인간으로 분류된 사람이였다. 이 사람은 예외로 삼아야하는게 아니냐는 의견들이 잠시 있었지만 문제는 이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 소위 정상인이라고 부르는 사람의 수와 비슷하게 됐으므로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됐다. 결국 그의 주장도 받아들여져 삼각뿔의 관념에 새롭게 추가되었다. 삼각뿔은 두리뭉실하면서 단순화 시킬 경우 일종의 삼각형 모양 처럼 보일 수 있다고…


얼추 정의를 마무리를 하려는 순간 또 한 사람의 반론자가 나타났다. 


“잠깐! 나도 당신들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어. 나한테는 니들이 말하는 그 삼각뿔이란 것이 그저 아주 작은 점으로만 보일 뿐이야.  이쪽에서 보나 저쪽에서 보나 혹은 위에서 보나 아래에서 보나 모두 흰 점으로만 보인다구.” 


삼각뿔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있는 누군가가 소리질렀다. 그에게는 삼각뿔이 너무 멀어서 검은 점으로만 보였다. 


“이쪽으로 가까이 오셔서 보셔야죠. 그렇게 멀리 떨어져있으면 당연히 작게 보이죠” 


“아, 당신들이 말하는 삼각뿔이란걸 당신들이 말한대로 보려면 특정 위치에 있어야한단 말이군. 그렇다면 내가 보는 삼각뿔의 모습도 정보에 추가해줘야할 것 같아. 난 여기서 한발짝도 꼼짝도 할 수가 없거든. 내 관점이 무시당해야하는 그럴듯한 이유를 얘기해준다면 포기하겠지만…” 


무시할 만한 별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었으므로 결국 멀리 떨어진 사람들을 위해서 삼각뿔의 또 다른 정보가 추가되었다. 이렇게 반론을 재기하는 사람들은 시간이 지날 수록 계속 늘어났고 새로운 정보를 계속 업데이트하다보니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삼각뿔을 중심으로 거의 모든 위치와 거의 모든 거리, 그리고 거의 모든 빛의 조건과 거의 모든 사람들의 시력을 감안해 종합해보니 처음 시작했던 삼각뿔의 모습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특정 위치에서 특정 사람이 보는 삼각뿔의 모습이 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버린 것이다. 혼란스러운 사람들을 위해 힘있는 몇몇 리더들이 결론을 내려야만 했다. 삼각뿔의 관찰을 위한 특정 조건을 리더들과 비슷한 특정 능력과 조건에 국한해 정의하고, 나머지를 모두 예외 혹은 정상적이지 않은 특이한 상황으로 분류해버렸다. 잠시 혼란스러웠던 사람들은 다시 리더들이 정의 내려준 관념을 수용하기로하고 그 대가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이야기는 끝이나지만 의문은 남아있다. 

삼각뿔의 진짜 모습은 어떤걸까? 

삼각뿔이란 것이 객관적으로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강봉구는 객관적으로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나’가 삼각뿔이라면? 

‘나’가 강봉구라면? 


관점에 따라서 대상을 다르게 인식한다는 것은 단지 관계성의 측면에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 모든 측면에 해당되며 상대성 세계에서 우리의 경험은 모두 이것의 반영이다.  


나비가 내려앉을 곳을 찾지 못한다면

나비는 어디서 쉬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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