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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말록 Apr 11. 2020

관점에 대한 관점

내 관점은 어디에 있는 걸까?

'나'의 관점은 고정돼있지 않다. 


나의 관점은 언제나 ‘나’라는 육체에 갇힌 두뇌의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 같지만, 사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시로 관점의 벗어남을 경험한다. (유체이탈 같은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예를 들어 키가 큰 사람을 보고 키가 크다고 느낄 때, 우리의 관점은 작은 사람에게 가있다. 언뜻 생각하면 ‘주의’가 있는 곳이 관점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반대 격인 대극이 바로 관점이 머무는 곳이다. 예를 들어 키 큰 사람을 보고 ‘키가 크다’고 느끼는 것은 나의 관점이 작은 사람에게 가있기 때문이다. 지금 현재 큰 사람 옆에 서있는 상대적으로 작은 사람이거나 혹은 일반 사람들에 대한 나의 관념일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옆집에 사는 능력 있는 남자를 보면 어느 순간 나의 남편은 초라하고 결함 투성이인 것처럼 보인다. 이때 나의 관점은 옆집 남자에게 가있는 상태다.  


걸리버가 거인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의 관점이 걸리버보다 작은 소인들에 가있기 때문이다. 소인국 사람들이 작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의 관점이 상대적으로 큰 걸리버한테 가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걸리버를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의 관점이 우리 자신에게 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식이 관점을 갖는 순간 상대적인 대상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상대성 세계에서 '드러남'의 기본적인 매카니즘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관점과 그로 인해 생기는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크다는 것은 작다는 것에 의지해 생겨나는 개념이다. 관점의 깃발이 꽂히는 순간 필연적으로 대극을 만들어낸다. 관점은 그 대극에 의지해서만 성립되는 개념이다.  


빈 방 안에 검은 공 하나가 공중에 등장했다고 생각해보자. 우리는 이 검은 공의 크기와 위치를 쉽게 가늠할 수 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벽이 사각형의 막힌 공간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좌 우 앞 뒤의 벽으로부터 얼마간 떨어진 위치에 축구공 만한 사이즈의 검은 공이 떠있다…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벽이 모두 사라지고 텅 빈 우주공간으로 배경이 변했다고 상상해보자. 우주공간이라고는 하지만 이 공간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이 공간의 끝은 무한대다. 한계가 없다.  물론 관찰하는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검은 공만 허공에 떠있을 뿐이다. 이때 우리는 과연 이 공을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우선 가장 큰 문제는 공간적 위치를 특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비교 대상이 없는 무한 허공에서 위치란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크기 역시 알 수 없다. 비교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동그란 모양은 구별할 수 있을까. 그것 역시 불가능하다. 동그라미와 다른 비교 대상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모양 역시 구분할 수 없다.

구분이 가능하다는 것은 대극이 만들어졌다는 의미다.  


이렇게 무한이란 개념이 등장하는 순간 드러난 모든 것을 블랙홀처럼 삼켜버리게 된다. 그래서 누군가는 한밤중 이불속에서 이 무한이란 것을 떠올릴 때마다 몸서리가 쳐진다고도 했다.


우리는 우주의 끝을 본 적이 없다. 그것이 우리가 스스로의 존재성에 대한 의심을 멈추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그 끝을 만나기 전까지는 우리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서 정의 내리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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