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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말록 Mar 20. 2020

성품 없음과 모양 없음

성품이 없다. 성품이란 것은 존재성을 말한다. 세상에 드러난 모든 것은 독립적인 성품이 없다. 그것만이 갖고 있는 고유한 성품이 없다. 그래서 성품이 없다는 말은 달리 말하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이 말을 들으면 우리는 3일 밤낮을 꼬박 새우며 이 말의 무게에 짓눌려야 한다. 왜냐하면 지금 이 세상이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세상이 아니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눈앞에 사과가 있다고 예를 들어보자. 누군가 무엇이 존재하는가..라고 물을 때 우리는 사과란 것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과의 성품은 모양 색 맛 크기 등의 속성들의 집합을 의미한다. 그 특성들을 인식한 우리는 사과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는다.


그 사과의 성품들은 존재하는가? 달콤한 사과 맛, 둥그런 모양, 붉은색 등등…이런 것들이 인식되는 것은 확실하다. (인식이 되니 존재한다고 섣불리 결론 내리지 말자.)


달콤한 사과의 맛은 존재하는가? 사과를 먹으면 맛이 느껴지니 뭔가가 있는 것 같기는 하다. 사과의 객관적인 맛의 속성이란 것이 있고 그것을 내 혀가 느꼈다고 생각한다. 만일 그렇다면 사과의 맛은 사과에게 있는 것인가? 아니면 내 혀에 있는 것인가? (박수 소리는 오른손에 있는 것인가 왼손에 있는 것인가?) 만일 사과의 맛이란 것이 사과 자체에 있는 것이라면 그 맛은 누구나 혹은 무엇이나 동일하게 느껴야 한다. 심지어는 손가락을 갖다 대도 사과의 맛이 느껴져야 한다. (저 밖에 존재하는 사과를 내 혀의 감각기관으로 센싱했다는 프레임에 갇혀있으면 이 문장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사과의 모양은 존재하는가? 동그랗고 주먹만 한 붉은 사과가 분명 인식이 된다. 그리고 손으로 만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사과의 모양은 사과가 가지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내 눈에 있는 것인가? 만일 사과에 그런 모양이 있는 것이라면 박쥐에게도 동일한 사과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지 않은가? 그 모양이 정말 사과의 성품, 즉 사과가 갖고 있는 무엇이라면 누구에게나 무엇에게나 동일하게 인식되어야 한다. 다르면 안 된다. 그런데 색맹인 누군가에게 붉은 사과는 없다. 정상적인 일반 사람을 기준으로 생각해야 하지 않느냐 반문한다면 이런 질문을 떠올려보라. 정상적인 일반 사람들의 시각을 기준으로 세워야 하는 당위성은 무엇인가? 꼭 그 제한적인 조건 속에서만 온전히 이런 사과의 모습이 드러난다면 그것을 사과의 고유한 성품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사과의 성품이라고 굳게 믿는 모든 것들이 이와 같다. 이것이 뻔히 눈앞에서 인식이 되면서도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시간이 지나면 사과의 특성이 변한다는 사실 때문에 사과의 성품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품을 따지는 일은 시간의 흐름과는 관계가 없다. 시간이 흘러서 사과가 썩고 모양과 맛이 달라지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니 결국 성품이 없는 것이다...라고 설명하는 이도 있지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사과의 성품이 없음]은 시간의 흐름과는 상관없다. 그것은 우리 생각 속에서만 벌어지는 일이다.


아주 짧은 시간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찰나를 붙들어서 시간을 멈췄다고 상상해보자. 이때 나타나는 것들은 그럼 존재하는 것인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이때 인식되는 현상은 존재하는 것인가? 이때 만일 찰나라도 현상이 있었다고 하면 그것은 존재가 된다. 만일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현상 자체가 찰나적 존재가 된다. 아무리 짧은 시간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그래서 현상은 있지만 존재는 없다는 말은 옳지 않다. 현상도 있고 존재도 있던지 현상도 없고 존재도 없던지 해야 옳다. 그래서 모양만 있고 성품은 없다는 말도 맞지 않다. 정말 모양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성품이 되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무엇이라도 있다면 그것이 바로 성품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실체는 없고 연기의 작용만 있다고 하는 것 역시 바른 견해가 아니다.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데 알맹이라고 할 것이 없으니, 이 불일치를 봉합하려는 시도가 바로 [작용은 있지만 실체가 없다] 방식의 이해다.


그래서 결국 성품이 없다는 말은 모양도 없다는 말이다.  눈에 보이고 만져지더라도 눈앞의 대상들은 결코 존재하는 것들이 아니란 말이다. 여기에는 대상적인 ‘나’도 포함된다. 지금 당신 눈앞에 무엇이 있든지 간에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현상이란 것 역시 존재할 턱이 없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꿈과 같고 환과 같고 이슬과 같다고 한다.


그런데 왜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 경험되는가? 왜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것일까? 여기에 대한 설명이 바로 ‘인연생기’ 즉, ‘연기’다.


안다.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납득이 가지 않는 이유는 지금까지 살면서 배우고 습득한 지식에 대한 무의식적 믿음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나라는 육체가 저 밖의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을 인식하고 살아간다는 믿음이다. 내가 태어나서 이 3차원 공간 속에 살다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믿음이다.  믿음’이라고 했다. 살면서 얻은 지식과 경험이 모두 이 핵심적인 프레임에 맞춰져 있다. 우리의 경험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원적인 생각방식으로 해석하면서 패턴화 된 세계관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주객이 전도되어 이런 세계관이 먼저 있고 모든 경험들이 이 프레임에 귀속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어떤 경험을 하든지 간에 이 프레임에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간다. 그것이 바로 생각 혹은 관념이다.


보통 생각이라고 하면 문장으로 된 생각을 떠올리지만 사실은 개념화된 생각이 더 큰 역할을 한다. 3차원 세상에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바로 이런 개념화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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