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즉문즉설에 관하여
내 오른 손목에는 항상 염주가 물려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마치 불교신자 인 줄로 알지만 사실 나는 불교를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한국 불교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특히 지금과 같이 기복신앙으로 도배가 된 한국 불교 상황이라면 더더욱 불교를 좋아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아내와 함께 차로 이동할 때면 언제나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듣는다. 아내가 좋아하기도 해서지만 불법을 실생활 버전으로 풀어가는 과정이 매우 흥미롭고 재미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거침없는 표현이나 사회적 도덕적 기준에 벗어난 듯 보이는 내용이 불법의 이름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듯하다. 비판의 목소리도 간혹 들리기 때문이다. 비판은 대부분 사회적 도덕적 관습에서 벗어나는 내용들에 대한 것들이다. 예를 들어 학교도 가지 않고 하루 종일 게임만 하는 아들이 고민인 질문자에게 아이를 바른 길로 인도할 일반적 해법을 주는 대신 오히려 부모의 욕심이 지나치다고 꾸지람을 준다. 바람피우는 남편에 대해 한탄이라도 할라 치면 여지없이 꾸지람이 질문자에게 돌아오곤 한다. 통념적으로 비뚤어진 아이는 바로 잡아야 할 대상이고 가정이 있는 남자가 바람을 피운다면 분명 도덕적으로 지탄 받아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혼이 나는 쪽은 잘못을 저지른 쪽이 아닌 질문자다. 왜 그럴까?
유식한 말로 불법은 연기법이다. 풀어 말하면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세상의 모든 것들이 실체라고 할 것이 없으니 결코 아무것에도 머물지 말라는 말이다. 실체라고 할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실체라고 '착각'하고 있으니 착각하지 말고 똑바로 보라고 말한다. 실체라고 할 것이 없음에도 그것을 실체화시키는 유일한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그 생각이 바로 '머물음'이다. 그 '머물음'이 틀렸다고 일러주는 것이 법륜스님의 설법이다. 그 모든 당신의 생각(머물음)이 틀렸다고 일러주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쉽게 일러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방편으로 '비교'라는 방법을 사용한다. 게임만 하는 아들을 살인을 저질러 감옥에 간 아들과 비교해주고 바람피우는 남편을 둔 아내에게는 남편이 죽어 슬픔에 빠진 과부의 처지와 비교한다. 이 비교는 단순히 '봐라 이렇게 너 보다 불행한 사람들도 있는데 너는 그래도 살만 하지 않느냐' 정도의 위로가 아니다. 살인을 저질러 교도소에 간 아들을 생각하면 집에서 게임만 하는 아들은 너무나 훌륭한 아들이 된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한심해 보이고 골칫덩이였던 아들이 단순한 '비교'를 통해서 훌륭한 아들이 된다. 바람을 피워 때려죽이고 싶던 남편이 비교를 통해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은 쓸만한 존재가 된다. 이 비교는 기준점의 이동을 의미한다. 단순한 기준점의 이동만으로도 내 아이가, 내 남편이 다른 존재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것은 당신의 한 생각이 머무는 순간 곧바로 틀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디로든 그 기준점을 옮기는 것이 가능하다면 과연 나의 생각, 골칫덩이 아들, 골칫덩이 남편이란 개념은 어디에서 정당성을 찾을 수 있을까. 골칫덩이 아들과 남편이라는 생각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것은 바로 스스로 만든 하나의 생각이었을 뿐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수많은 대중들의 질문들은 각양각색이지만 스님의 답변은 언제나 하나다. 많은 예를 들어가며 꾸지람하고 얼르기도 하고 공감하기도 하지만 결국 스님의 법문은 하나인 것이다.
너의 생각은 언제나 틀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