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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에 한쪽 발을 딛지 않고서는 다음 발을 내딛을 수 없는 게 우리 현실이다. 그러니까 한쪽 발이나 두쪽 발을 딛고 서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인식하는 그대로 실체적인 세상이 탄생한다는 말이다. 물론 실제로 탄생하는 건 아니다.
우리 눈은 양각을 인식하기 위해선 음각에 한쪽 발을 딛어야 하며, 반대로 음각을 인식하기 위해선 양각에 기대야 한다. 개념도 마찬가지다. A를 인식하기 위해선 Not A 가 필요하고 Not A는 A를 기대고 일어선다.
그러니까 우리가 한 발을 딛고 있는 것은 필연적으로 인식의 구조로 드러나기 위한 너무나 자연스러운 결과다. 드러나기 위한 기본 메커니즘이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세계와 경험은 이것을 기반으로 한다.
그런데 그 한 발을 뗀다는 말은 무슨 말 일까? 딛고 있는 한 발을 떼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드러남, 즉 경험과 인식의 기반인 그것의 한 발을 뗀다는 것은 마치 인식을 포기하고 경험을 사라지게 하는 어떤 것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그런 건 아니다. 드러난 유희를 억지로 잠재울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한 발을 뗀다는 것은 당신과 당신의 관점(둘이 다른 것은 아니지만...)이 공중에 붕 뜬다는 것이고, 당신이 공중에 뜬다면 사과는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게 된다.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사과는 사과도 아니고 사과 아닌 것도 아니게 된다. 이 선문답 같은 알쏭달쏭한 얘기야말로 너무나 논리적이지 않은가?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는걸 당신은 뭐라고 부를 샘인가?
허공 같은 관점이란 말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이처럼 매우 구체적인 말이다. 지금 당장 이 허공 같은 관점이 무엇을 말하는지 스스로 체험해 볼 수 있다. 당신의 휴대폰을 눈앞으로 가져와 보라. 너무나 크지 않은가? 다시 멀리 떼어봐라. 너무나 작지 않은가? 끝. 이게 허공 같은 관점이다. 당신이 매일 경험하고 있는 이것. 이 허공과 같은 관점에서는 휴대폰은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다. 이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닌 휴대폰은 그럼 휴대폰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런 말을 들으면 당신의 한쪽 발은 열심히 주위를 더듬기 시작한다. 그것은 원근감에 의해서 멀면 작아지고 가까우면 커지는 것처럼 보일 뿐 실제로는 다만 내 손안에 들어가는 고정된 크기일 뿐이다,...라고 발을 디딜 것이다. 이때 당신이 조금 영민하다면... 당신이 야심 차게 내디딘 '당신의 손'이라는 디딤돌 또한 '휴대폰'과 똑같이 관점에 의해 커지고 작아지는 즉, '손' 아닌 것들을 딛고서야 비로소 '고정된 크기'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즉 또 다른 디딜 곳을 필요로 하는 당신의 한쪽 발과 다르지 않음을 눈치챌 것이다. 구름을 만들기 위해 옆에 구름이 필요할 뿐이라서 아무리 솜사탕을 모아서 호랑이를 만들어도 그저 맛있는 솜사탕일 뿐인 것이지 어디에도 우리가 두려워할 호랑이는 있을 수 없다는 건 당신도 이미 잘 알고 있다. 그 한쪽 발만 뗀다면 말이다.
쉴 새 없이 더듬고 있는 당신의 다른 한쪽 발을 보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