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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말록 Jul 07. 2023

똑똑똑, 이겁니다.

"똑똑똑, (책상을 두들기며) 이겁니다."

"이것입니다~" (죽비를 들어 보임) 

"생각으로 아는 게 아닙니다. 지금 저를 보고 있죠? 바로 그걸 말합니다."

"(똑똑똑) 애쓰지 않아도 듣고 있죠? 바로 그걸 말하는 겁니다."


나이 든 보살님들은 눈만 껌뻑거리며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해 답답한 표정들이다. 죽기 전에 깨닫겠다고 급한 마음에 찾아 나선 길일 텐데 눈앞에서 직접 가리켜 보이는 가르침에 아무런 힌트도 얻지 못하는 눈치다.


당연히 죽비도 보고 소리도 듣지 그걸 못 보는 사람이 어디 있나? 그것이 깨달음이라고? 그것이 견성이라고? 이건 너무 당연한 소리 아닌가? 세상에 이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나?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게 깨달음이라고?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그동안 들었던 체험에 대한 이야기들과는 아무래도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저 양반이 거짓말을 하는 거 같지는 않다. 모두들 같은 생각이 맴돌지만 아무도 선뜻 나서서 질문을 던지지 못한다. 질문을 던지면 돌아올 답은 뻔하다. '그거 다 생각이잖아요?' 


왜 이렇게 어려워하는 걸까? 


결론은 너무 쉬워서 어렵다. 물고기가 물을 의식하는 게 어려울 리 없다. 내가 나를 자각하는 게 어려울 리 없다. 실제로 그것을 보는 게 어려운 게 아니라 한치의 틈도 없이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어렵다. 평생 내내 줄곧 그걸 써왔기 때문에 새삼 돌아보지 못하는 것뿐이다. 


너무 익숙해서 보고 듣고 느끼는 그것이 마음이고 깨달음일 것이라고 상상도 못 하겠지만 그거 맞다. 그것을 가리키는 게 맞다. 오직 문제는 생각이다. 인식하는 앎은 다르지 않지만 이걸 모르는 이유는 생각이 끼어들어서 그렇다는 말이다. 생각이 끼어들어 움켜잡으려고 하니 안 되는 거다. 


분명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느끼는 그 앎이지만 그것을 '나'가 자각한다고 '생각'하면서 진실을 가려버린다. 생각의 내용, 경험의 내용에 빠지는 게 아니라 그 앎 자체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그러면 '나' 역시 그 앎의 대상이라는 보게 된다. 


죽비를 보고 소리를 듣고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인식된다. 이 모든 것들이 내가 하고 있다는 생각이 믿음으로 밑에 깔려있으면 어렵다. 이 모든 하나의 경험은 생각이 필요 없다. 생각도 이 앎의 대상이다. 생각을 하지 않아도 경험이 일어나는 걸 알 수 있다. '내가 경험한다'라는 생각이 없이도 경험은 일어난다. '내가 경험한다'는 생각을 제외하고 그저 경험의 맛을 느껴야 한다. 


마음속으로 노래를 불러보면 분명 그 노래가 인식된다. 귀로 듣지 않아도 분명 노래는 '앎' 위에서 일어남을 알 수 있다. 노래가 따로 있고 '앎'이 있는 게 아니라 노래 자체가 '앎'이다. 앎이 없으면 노래도 없다. 


여기엔 모양도 없고 소리도 없어서 우리가 그동안 익숙하게 인식해 왔던 대상들과는 다르다. 그래서 맛을 보라고 하는 것이다. 그 맛에 익숙해져야 한다.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답답해할 것이 아니라 그 답답함이 이 앎이라는 것을 재빨리 돌이켜야 한다. 손에 쥘만한 개념이나 대상을 원하지만 그 유혹에서 벗어나서 경험 자체의 맛을 스스로 확인해야 한다. 


눈앞에 모든 것을 내가 본다고 생각하지만 그 '봄'에는 본다는 생각도 없고 보는 주체도 없다. '봄' 자체는 사실 봄이 아니라 '앎'이다. 눈앞에 보이는 대상의 그 모양을 따라 앎이 감싸고 있다. 그 앎이라는 공간의 맛을 봐야 한다. 그 공간에 '나'도 함께 경험되는 대상으로 인식된다. 


죽비를 들어 보이면 그 죽비는 죽비가 아니라 '앎'이다. 

탁자를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면 그 소리는 소리가 아니라 '앎'이다. 

죽비를 보는 누군가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앎'만 있다. 

탁자 소리를 듣는 누군가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앎'만 있다. 


누구의 앎이냐는 물음이 떠오른다면 그것은 그저 생각이다. 

생각의 내용은 모두 임시적이고 가상적이라 실체가 없다.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 


양말이 뒤집어지듯 반전이 일어난다. 진짜가 가짜가 되고 가짜가 진짜가 된다. 그리고 다시 모두가 진짜가 된다. 세상이 원래 그러함을 알게 된다. 


'나'가 지각한다는 믿음을 리셋하지 않으면 결국 소 귀에 경 읽기다. 그렇다고 그 믿음을 다른 믿음으로 대체하진 마시라. 


계속 모르겠다면 모르겠다는 걸 여전히 알고 있다는 것을 돌이켜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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