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 보기
정말 깜쪽같이 속았다. 눈을 살짝 뜨고 나서 처음 들었던 생각이다. 누가 일부러 속인 것은 아니다. 눈을 뜨기 전까지는 속을 수 밖에 없는 구조라서 그렇다. 어차피 그렇게 속아줘야 하는 것이 본래의 각본이다. 영화관에 들어갔다면 이야기에 푹 빠져야 돈이 아깝지 않겠는가. '이것은 진짜가 아니다'를 되뇌며 몰입하지 않겠다면 영화관은 의미가 없다. 그렇다고는 해도 정말 죽을 만큼 괴로울 땐 알아서 깨어나주면 좋겠지만, 그조차도 각본의 일부라 자연스럽게 혀용되지는 않는다.
일단 눈을 뜨고 나면 속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마치 이미 알게 된 것을 모르는 것으로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는 계속되지만 그 속에서 벌어지는 소동이 진짜라고 믿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해진다. 일단 빨간약을 먹으면 절대 되돌릴 수 없다.
언어는 저쪽 세상의 도구다. 모든 것이 따로따로 분리된 세상의 소통 수단이다. 어쩔 수 없이 분리되지 않은 본래의 모습을 표현하는데 근본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이 제한적인 도구로 이야기를 풀다 보면 이야기는 언제나 추상적으로 들리거나 관념적으로 들린다. 그마저도 모순의 형태로 묘사되어 혼란스럽게 들리니, 여기서부터 어려움이 시작되고 표현의 기술이 필요해진다.
이렇게 표현된 이야기는 비이원의 영역에서는 1+1=2 인 것처럼 너무나 당연하지만, 이원적 인식으로는 마치 1+1=6처럼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들린다. 그런데 사실은 그 반대다. 뻔히 눈 뜨고 진실을 보고 있으면서도, 전혀 엉뚱하게 생각으로 재구성된 세상에 눌러앉는 모습이 신기할 정도로 묘하게 다가온다.
이런 기가 막힌 현상이 벌어지는 이유는 인식구조의 차이 때문이다. 다음의 이야기도 그런 평범한 비이원의 표현이 이원의 영역에서는 묘하게 들리는 그런 주제 중 하나다.
살다 보면 지나간 시간들이 꿈만 같이 느껴진다. 10여 년 전의 일이 실재인지 아니면 꿈이었는지 모를 정도로 꿈과 기억의 질감이 동일하다. 둘 다 지금은 없기는 마찬가지고, 오직 기억의 공간에서만 부유하는 심상이다.
있는 그대로 살펴보면 지금 이 순간에는 10년 전도 없고 어제도 없다. 그런데 생각으로는 10년 전의 ‘나’가 지금까지 쭉 이어져 살고 있는 것 같고, 어제의 가족들도 지금까지 쭉 이어져 살고 있는 거 같다. 모든 것들이 10년 전으로부터 지금까지 쭉 이어져 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10년 전의 나와 같은 '나'고 우리 가족들도 어제와 똑같은 사람이라고 여긴다. 디테일은 달라도 언제나 나와 추억을 공유하는 그들이 있다. 이런 시간 공간적 개념 구조 속에서 지금 우리의 전형적인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이 개념의 세상이 아직 살만한 사람들은 꿈에서 깨어날 필요성을 잘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아무리 호기심이 많더라도 눈을 뜨는 경우가 많지 않다. 그러나 50이 넘어 삶의 저울이 기울어지기 시작하고 죽음을 앞두고 있다면 그 탈출구로 종교나 깨어남이라는 것을 찾게 된다.
혹시 당신의 삶이 그런 순간이라면 오늘 이야기는 유심히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혹시 읽다가 눈을 뜨게 되는 행운이 당신에게 올지도 모른다. 단박에 깨어나는 희망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고정관념에 균열을 일으키는 좋은 인연을 만날지도 모른다. 깨어남은 내일이 아닌 지금의 일이고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다.
어렵지 않다. 기존의 고정관념을 잠시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를 보면 된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앞서 서두에 던진 ‘시간 개념’과 무엇이 이어진다는 개념에 대해서 살펴보는 게 오늘 주제다.
먼저 어제의 그 무엇도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슴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어제라고는 했지만 사실 0.1초 전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무엇도 지금 여기로 가져올 수 없다는 점이 동의가 되는가? 익숙하지는 않지만 아무도 부인할 수는 없다. 어제 먹으려고 냉장고에 넣어둔 '사과'를 오늘 발견하며, '어제의 사과'와 '오늘의 사과'를 같은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어제의 사과와 오늘의 사과가 같다는 것은 개념으로 지은 이야기다. 왜냐하면 어제의 사과는 머릿속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어제의 사과라는 기억에 의존해서 지금의 사과가 어제에서 지금까지 이어져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일 어제의 사과와 오늘의 사과와 동일하다, 혹은 동일하지 않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어제의 사과'가 옆에 있어야만 한다. '같다' 혹은 '다르다'는 비교는 기본적으로 두 개를 놓고 비교하는 것이지 지금 존재하지도 않는 가상의 무엇을 두고 비교하는 것은 사실 난센스다. 우리의 개념 놀이는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부자연스러움의 연속이지만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돼버렸다. 상상의 이미지와 비교하는 웃지 못할 일이 자연스럽게 벌어진다.
무언가가 이렇게 이어진다고 하는 것은 개념이다. 우리는 그런 개념이 아주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세상을 살아가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그런 개념이 개념일 뿐인 것을 알아보면 세상은 정말 특이한 현상이고 그 어느 하나도 당연한 것이 없다. 이것은 사람이 맨 몸으로 하늘을 날아다니고 초능력을 발휘하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기묘한 일이다.
어제의 그 무엇도 지금 없다는 것에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시간을 줄여서, 방금 전의 그 무엇도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라. 방금 전의 '나'는 지금 여기 이렇게 있고, 내가 그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다. 나의 질문은 '방금 전의 그 무엇이 지금 있느냐'이다. 방금 전의 그 무엇도 지금 이 순간에 갖고 올 수 없다. 당연하게도 방금 전의 그 무엇이 지금 있지 않다는 것. 이것이 확실하다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의 개념 세계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개념이 무너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개념을 붙들어 어제의 그 무엇이 지금 이렇게 이어져 왔다고 생각한다. 여기 어제의 사과가 이렇게 있다고 말하면서 사과를 나에게 들어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의 사과이지 어제의 사과가 아니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어제의 사과가 지금 없는데 지금의 사과가 어제의 사과와 어떻게 동일한 사과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뭔가가 과거로부터 이어져 오고 있다고 믿는 것을 '실체적 존재 관념'이라고 한다. 실제로 무언가가 있어서 시간을 따라 쭉 이어진다고 믿는 것이다. 이 개념을 안고 사는 것은 우리의 삶의 기본적이 메커니즘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진실은 아니다. 예를 들어 소꿉친구와 돌멩이를 아침밥이라고 여기며 먹는 시늉을 하더라도 그 돌멩이가 진짜 아침밥이 아닌 것과 같다. 이 개념 놀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실체적 존재 관념'이고 나는 이것을 쉽게 '덩어리감'이라고 부른다. 실제로는 덩어리가 아닌데 덩어리라고 할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덩어리라고 간주하고 그 덩어리를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끌고 다니는 것이 개념 놀이다.
냉장고에서 지금 꺼낸 사과는 개념이다. 실체적 존재 관념이고 덩어리다. 그래서 과거라는 개념에서 끌고 와서 지금 손에 들고 어제부터 있었던 사과라고 말하는 것이다. 개념의 특징은 시간을 넘나들고 공간을 넘나 든다. 그래서 개념은 매우 편리하고 유용하다. 그러나 그 개념 때문에 인간은 괴로워하게 되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사과의 모양은 지금 이 순간 똑같이 인식된다. 모양과 감촉과 부피가 인식된다. 그러나 그 인식의 내용이 '사과'는 아니다. '사과'가 아니기 때문에 과거로부터 쭉 이어져 올 방법이 없다. 그럼 사과가 아니고 무엇이냐? 그것은 그저 모양 감촉 부피의 인식 값으로 인식되는 인식의 내용이다. 그것인 연기적으로 지금 이 순간 이런 인식의 내용으로 드러난 현상이지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무엇이 아니다. 사과라는 특정 덩어리로 인식하는 것은 그저 우리의 생각일 뿐이다.
어제의 무엇도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필연적으로 지금의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꽤나 급진적인 말이다. 요즘은 이런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하지만 예전이라면 단두대에 목이 달아날 정도로 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엄청난 말일지도 모른다. 어제의 사과가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면, 지금의 사과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지금이 어제고 어제가 내일과 다르지 않다. 어제가 지금이었다가 시간이 흘러 어제가 되는 게 아니다. 어제가 지금이었던 그 순간에도 그 지금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황당한 이야기가 제자리를 찾기 위해선 지금 이 순간 냉철하게 사유해 볼 필요가 있다. 어제의 그 무엇도 지금 왜 존재하지 않을까? 어제는 무엇이고 지금은 무엇인가? 지금은 어떤 순간을 가리키는가? 우리는 왜 무슨 수를 써도 '지금'을 붙들지 못하는가?
어제의 ‘나’가 없다면
그런 ‘나’의 삶은 무엇인가?
그런 ‘나’의 죽음은 무엇인가?
당신은 10년 전과 지금의 거리, 어제와 지금의 거리, 그리고 방금 전과 지금의 거리가 모두 같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안다. 그래서 어제가 꿈처럼 느껴지듯 10년 전도 똑같이 꿈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니 10년 후인 미래의 관점에서, 지금이 10년 전 과거이며, 그 과거의 꿈속을 살고 있다고 해도 진실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다. 이렇게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완전히 뒤집혀 버리고, 비로소 전도몽상이 제자리를 찾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