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꼬리찾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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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예능 프로그램에는 자막 플레이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에도 분명 작가가 필요하다. 리얼리티에 왜 작가가 필요한 걸까? **실제로 찍은 영상에는 최종적으로 우리가 보고 인식하는 그런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 방송 작가는 이런 조각들을 모아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야만 한다. 그리고 시청자들에게 이야기를 주입하고 설득해야 한다. 그것이 편집과 자막의 역할이다. 특정 방향으로 이야기의 흐름을 몰아가기 위한 장치인 것이다. 그 주제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편집이 이루어지고 자막이 씌워진다.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개념을 통한 분리를 필요로 한다.** 이야기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분리의 속성을 가진 ‘개념’을 기본 단위로 해야만 한다. 관절이 꺾이지 않으면 모양을 만들 수 없듯, 단 하나의 무엇으로는 이야기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런 개념이 만일 허상이라면 분리도 허상이 된다. 분리가 허상이라면 이야기도 허상이다.
그러나 이야기에 중독된 우리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탐닉한다. ‘나’는 언제나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서사를 만들어가고 있으며 영화나 드라마 그리고 각종 엔터테인먼트 산업들도 매일 수많은 이야기를 쏟아 낸다. 뿐만 아니라, 사실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만 같던 뉴스와 다큐멘터리조차 각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만들어 전달한다. 이야기 속에 살다 보면 그것이 당연하게 생각되지만 사실 개념을 벗어나 이야기의 서사를 보면 매우 인위적이고 억지스럽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기억나지 않겠지만, 우리 모두는 한 때 경이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세상을 보며 살았었다. 자아라는 개념과 분리의 마법이 펼쳐지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흥미롭고 역동적이었다. 가끔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마주하거나 놀라운 일 혹은 극한의 감동을 경험할 때, 분리 이전의 세상을 힐끗 보기도 한다. 추상적인 미술 작품에 집중하거나 웅장한 음악을 감상할 때도 잠시 생각에서 벗어나는 경험을 한다. 개념으로 해석 하려하지만 기존의 개념을 붙이기 어렵기 때문에 격게되는 현상이다. 새로운 경험이 개념의 필터를 거치지 않고 받아들여질 때의 생소함이다. 개념이 붙지 못하니 당연히 ‘이해’가 불가능하다. 이런 ‘이해할 수 없음’이 처음에는 불편함으로 다가 온다. 그래서 다시 어떤 식으로든 이해하고 정리하는 방식으로 결론을 냐리려고 애쓴다. 점점 나이가 들면서 분리의 마법 속으로 빠지게 되고, 대부분은 거기서 멈추거나 병적인 퇴행으로 삶을 마감한다. 나와 너, 이것과 저것이 분리된 세상을 원래의 모습 기억하면서 말이다….(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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