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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말록 Jan 28. 2024

이걸 깨치면
제프 베조스도 부럽지 않아

'비교'의 숨은 의미

크거나 작거나
혹은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거나



여기 빈 병 A와 B가 있다.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다. 우리는 B를 '작은 병'이라고 부르고 A를 '큰 병'이라고 부른다. 의심의 여지없이 A는 커 보이고 B는 작아 보인다.


작은 병으로 인해 큰 병이 생기고, 큰 병으로 인해 작은 병이 생긴다. 


이제 A를 지우고 더 작은 C를 B옆으로 갖고 와 본다. B는 변함없이 그대로지만 이제 B는 C 덕분에 '큰 병'이 됐다. 그리고 C는 B 덕분에 작은 병이 됐다. 우리는 이제 B를 '큰 병'이라고 부른다. 여기에는 아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작았던 병은 이렇게 다시 큰 병이 된다. 


이제 B만 홀로 남겨보자. 방금 큰 병이라는 속성과 작은 병이란 속성이 B를 관통하고 지나갔음을 떠올려 본다. 한때 큰 병이라고 믿었던 속성은 온데간데없고, 또한 작은 병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B의 속성이 스치듯 지나갔음을 떠올려보자. 이제 홀로 남은 B는 큰 병도 아니고 작은 병도 아니다.


비교 대상이 없어지면 이것은 무엇인가?


B는 그냥 병이다. '크다' 혹은 '작다'라는 건 비교(상대성) 속에서만 임시적으로 사용이 가능한 이름이었으나, 그것을 모두 떼고 나면 B는 그냥 병일뿐이다. '크다'거나 '작다'라는 속성이 붙지 못한다.


이쯤 되면 당신도 다른 사람들처럼 한 가지 의문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뭐 어쨌단 말이지? 개념이 붙건 안 붙건 달리지는 게 뭐지? 그리 새로운 사실도 아닌 거 같은데? 이런 생각이 무슨 이득이 있는 거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여기에는 매우 큰 뜻이 숨어있다. 비교를 통해서 알아야 할 사실은 바로 관념의 허구성이다. 이를 깊게 사유하면 관념의 실체를 문득 확인하고 이미 드러나 있는 실상을 보게 된다. 



우리의

일병 구하기


그러면 병 자체의 속성은 언제나 건재할까? 이를 살펴보기 위해 비교의 대상을 조금 바꿔 생각해 보자.


크다는 것이 탄생하기 위해 작다는 것이 필요했듯, ‘병’이라는 것이 존재하려면 ‘병 아닌 것’이라는 개념이 필요하다. 크기의 비교와 마찬가지로 개념은 언제나 상대적인 대극을 필요로 한다. 이것을 간단히 표현하면, 


B : A = 병 : 병 아닌 것(들)의 관계가 성립한다. (둘 다 상대되는 서로가 있어야만 존재가 가능하다.)


이제 위의 세 번째 그림과 같은 상황을 재현하기 위해 A(병 아닌 것)를 제거해 본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병 아닌 것들'을 제거해 보는 것이다. 자, 그럼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여기서도 병은 과연 무사히 생존할 수 있을까? 


무엇인가 하나의 개념을 세우기 위해서는 다른 한쪽 발은 반대쪽 개념을 딛고 버티고 있어야만 한다. 이것을 의식적으로 인식하는 습관을 통해서 이원성과 개념의 본질을 볼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위의 글에서 A가 큰 병이라는 '생각'을 떠올릴 때 그 생각의 반대인 비교 개념 즉, '작다'에 발을 딛고 있다는 것을 의식해 보는 것이다. 그것이 익숙해지면 그 상대적 대극을 과감하게 떼어보자. 그러면 A는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닌 공중에 붕 뜬 상태가 된다. 이것이 확실하다면 '병' 역시 '병'이 아니라는 사실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나 쉽게? 그렇다 믿을 수 없겠지만, 이렇게나 쉽게 눈을 떠버리게 된다. 그렇게 도도하고 심오하고 엄청난 경전의 이야기와 깨어남의 이야기는 단지 여기서 시작되고 끝이 난다. 


큰 것도 아니고 또한 작은 것도 아니라면 병일 수도 없는 것이다. 크다 작다를 말할 수 없다면 어떻게 '병'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측정 도구의 힘을 빌어, 그것은 30cm 되는 병이라고 위로해도 마찬가지다. 줄자와 비교해 크기를 정의한다고 해도, 그 측정도구 역시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다. 크기조차 정의 내릴 수 없는 것을 우리는 어찌 그리 순순히 존재한다고 말하고 '병'이라고 이름지을 수 있었을까.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라면, 그것은 '병'도 아니고 '병 아닌 것'도 아닌 것이다. 


此有故彼有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무한이 옆에 다가오기 전이라고 해도 이미 그것은 그것도 아니고 그것 아닌 것도 아니다. 그래서 단지 환(幻)과 같다 말하고, 이름하여 공(空)이라고 표현한다. 석가모니는 이 뜻을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라고 담백하게 말했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핵심인 '연기법'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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