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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말록 Mar 31. 2024

토모나오를 아시나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석가모니 가르침의 핵심은 연기법이다. 연기법은 존재의 실상을 깨닫게 하는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지만, 그 설명은 매우 단순하다. 단순한 만큼 오해도 많다. 


此有故彼有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전부다. 설명이 따로 필요 없을 정도로 이 말 그대로다. 이것이 있으니까 저것도 있다는 말이다. 언뜻 들으면 이것과 저것의 존재를 인정하는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반대로 이것과 저것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언어의 특성상 이원적 관점으로 표현하다 보니, 이것이 '있으므로'라고 했지만, 그것이 이것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현상적(이원적 관점)으로 볼 때 이것과 저것이 따로 존재하는 듯 보이지만 상호의존하는 관계이며, 서로가 서로에게 동시적으로 원인이 되고 동시적으로 결과가 되니 이 둘은 결코 둘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것]이라는 것을 따로 보는 것도 착각이고 [저것]이라는 것을 따로 보는 것도 착각이다. 개별적인 존재성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는 것은 우리의 이원적 인식구조 때문이다. 인식의 방식이 이원적으로 작동하므로 분리라는 환상을 만들어내는데, 그것이 바로 존재감의 본질이다.


이것을 우리의 현실 세계에 적용해 사유해 보면 이렇다.


지금 내 눈앞에 사과가 있다. 나의 주의가 사과를 인식하는 순간 자동으로 [사과]와 [사과 아닌 것들]이라는 이원적 분리를 만들어낸다. 이 분리를 통해서 사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이 된다. 또한 사과를 들고 이쪽저쪽으로 옮길 수도 있고 뒤집을 수도 있다는 공간적 분리감이 사과의 독립적 존재감을 더욱 강화한다. 그러나 진실은 우리가 [사과]를 이리저리 옮기는 그 순간에도 [사과 아닌 것들]에 의해서 사과는 존재한다. [사과]와 [사과 아닌 것들]은 다르지 않습니다. [사과]는 [사과 아닌 것들]에 의해 존재하고 [사과 아닌 것들]은 [사과]에 의해 존재하므로 둘이 다르지 않다.


여기에 붓다의 설명을 인식 차원에서 적용해 보면 이렇다.


사과[이것]에 의식이 집중되는 순간 사과 아닌 것들 [저것]로 이원으로 분화되므로, [사과]가 있으므로 [사과 아닌 것들]이 있고 [사과 아닌 것들]이 있으므로 [사과]가 있다. 


그런데 붓다의 연기법 설명에 따르면,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고도 했다. 그렇다면 내가 [사과]를 먹어 없애버리면 [사과 아닌 것들]은 당장 없어져야 마땅하다. 그런데 현실 속에서는 내가 [사과]를 먹어도 [사과 아닌 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다. 어째서 그럴까?


이것은 심법적 관점에서 모두 공이라고 퉁치지 말고 연기적 관점에서 살펴봐야 한다. 둘이 다르지 않다고 하면서 어째서 사과가 없는데도 사과 아닌 것들은 그대로 남아있는 걸까? 이원적인 관점에서 이런 의문은 당연하다.


토모나오를

아시나요?


잠시 읽기를 멈추고 아래의 질문에 답을 해보자. 

토모나오가 아닌 것들이 과연 존재하는가?


당신은 이 질문에 뭐라고 답을 할 것인가?

존재한다? 혹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도 아니면 잘 모르겠다?


아마 대부분은 잘 모르겠다로 답을 했을 것이다. 토모나오가 뭔지 모르니 그것 아닌 것들이 있는지 없는지 판단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달리 말해서 <사과 아닌 것들> 이 사라진 상태와 같다. 토모나오를 인터넷에 찾아보는 수고는 하지 말자. 방금 내가 임의로 만든 거라서 세상에는 없는 말이다.


<사과>라는 개념은 이미 당신의 머릿속에 자리하고 있어서, 내가 억지로 사라지게 할 수 없었다. 당신의 머리를 때려서 기억을 지울 수는 없으므로 의도적으로 <사과>가 사라진 상태를 만들기 위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개념을 갖고 온 것이다. 방금 전 당신은 토모나오가 뭔지 모르는 상태, 즉  <사과>라는 개념이 사라진 상태와 같았고, 그래서 <토모나오가 아닌 것들>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즉, <사과>가 아닌 것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부분은 당장 이해가 안 가더라도 시간을 갖고 꼭 깊게 사유해 보자)


이것이 사과가 사라지면 사과 아닌 것들이 사라지는 이치다. 이 이치를 가로막는 것이 바로 개념(관념, 생각)이다.


현상 세계에서 당장 사과가 사라진다고 해서 사과 아닌 것들이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라지는 것은 사과와 사과 아닌 것들을 이루는 경계다. 이 예시는 사실 물리적 세계가 아닌 개념의 세계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물리적 세계 역시 개념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이원성으로 드러나고 인식되는 것은 완전히 같다.


흑이 있으므로 백이 있다. 밝음이 있어서 어둠이 있다. 마치 판화의 음각이 없이는 양각이 드러나지 않는 것과 같다. 양각과 음각은 하나의 다른 부분을 지칭하는 것뿐이다. 떠받치는 하나가 있어야 인식되는 하나가 생기는 구조다. 공간은 대상을 드러내지만 대상 또한 공간을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다.


연기법의 시작은 어렵지 않지만, 공부의 깊이가 더해짐에 따라 다양한 어려움들을 만나게 된다. 그 모든 어려움들은 공통적으로 이원 의식이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다.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시작하는 공부 여정이니 너무나 당연하다.


그중 대표적인 걸림 포인트가 바로 '상즉상입'에 대한 부분인데, 이 주제는 다음 글에서 깊게 다뤄보도록 하겠다. 상즉상입까지는 모르더라도 오늘 소개한 글만 이해할 수 있다면 연기법의 핵심은 파악한 것이 된다. 물론 그렇다고 바로 눈을 뜨는 것은 아니다. 이해를 넘어 익히는 과정은 필수적으로 따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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