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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말록 Mar 26. 2024

깨닫는 시간 10년 줄이기

그물에 걸려 죽더라도, 도대체 그 그물이 뭔지 알고나 죽으면 억울하지는 않을지 모른다. 결국, 걸려 죽거나, 탈출하거나, 혹은 바람처럼 자유로워지거나. 이 글을 읽는 짧은 시간 동안 당신은 셋 중 하나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혹시라도 그것이 바람의 길이라면 이것만은 꼭 챙겨가자.



비이원에서

이원으로


컴퓨터 기술의 기본 단위는 0과 1이다. 0과 1은 꼭 숫자 0과 1이 아니라 하나와 하나 아닌 것, 즉 대비되는 두 개를 상징한다. 이 두 개의 '다름'이 있으면 인식 가능한 것으로 드러나고,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의 모양을 흉내 내는 것이 가능해진다. 컴퓨터 게임 속의 3D 세상은 이런 0과 1을 기본 단위로 현실을 카피하고 디지털 환경 속에서 재현된다. 정교함의 수준 차이만 있을 뿐 본질적인 인식의 메커니즘은 이 세상이 드러난 방식과 정확히 똑같다.


0과 1은 서로의 존재 없이는 성립하지 못한다. 0은 1이 있어야 0이고 1은 0이 있어야 1이다. 0이 0일 수 있는 것은 1이 있기 때문이고 1이 1일 수 있는 것은 0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엔 아무런 문제도 오류도 없다. 다만, 0이란 것과 1이란 것이 독립적으로 따로 분리되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 유일한 문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일상적인 의식 구조이며 이를 ‘이원성’이란 말로 표현한다.


 (이원과 비이원은 깨달음을 이해하기 위한 무엇보다 중요한 핵심 개념이다.)


나무가 자라서 꽃을 피우듯, 이원성의 등장은 필연적이고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개별적인 개체와 마찬가지로 집단적으로도 진화의 패턴은 동일하게 일어난다. 흐름의 방향은 ‘비이원’에서 ‘이원’이다. 어린아이에서 성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쉽다.


이원으로 분화된 의식은 그 차제로 아무 문제도 없다. 앞서 얘기한 데로 0과 1이 개별적으로 따로 존재한다고 착각하는 것이 유일한 문제다. 0과 1은 서로를 존재하게 하지만 필연적으로 대립의 모습을 띠며 갈등의 형태로 발전한다. 이 말은 이성의 발달이 필연적으로 갈등의 구조로 돌아가며 대립이 아닌 통합의 영역으로 끌고 가는 데는 근본적인 어려움이 있다. 이원의 분화를 문제로 인식하는 것은 단지 이 때문이다.


이것을 현실에 대입해 보면 문제의 심각성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이 말인즉슨, 컵을 책상과 구분하고, 컵이 책상과 따로 분리되어 존재한다는 당신의 일상적인 생각이 바로 문제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컵을 컵이라고 하고 책상을 책상이라고 하는 게 문제라면, 그럼 바보가 되라는 말인가?


물론 분화 이전으로 돌아가면 갈등은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성장의 방향에 역행하는 것으로 우리의 지향점이 아니며, 깨달음과도 상관이 없다. 순수한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거나 마음의 평화를 위해 무의식으로 깊게 진입하는 것이 깨어나는 것과는 상관이 없는 이유다.


(석가모니의 6년 고행이 결국 이것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어리석음을 되풀이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심하게 그를 모욕하는 방법 중 하나다.)


컵과 책상을 분리된 것으로 보는 것이 바로 스스로 친 그물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은 모두 그물 안의 세상이다. 믿기 어렵겠지만, 우리의 영적인 추구나 진리에 관한 탐구, 진정한 나를 찾고자 하는 모든 여정은 이렇게 신비할 것 없는 건조한 그물 구조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그물 속의 숭고함은

숭고하지 않다


당신이 온갖 신비한 이야기와 신통력 혹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체험과 숭고함을 추구하더라도 항상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추구의 대상이 과연 0인지 아니면 1인지 살펴보는 것이다. 만일 그것 역시 0이거나 1이라면 - 물론 대부분 혹은 전부 그렇겠지만 - 그것은 당신이 아직 그물 속에 있다는 의미다.


일단 아직 그물 속이라면, 그곳에는 딱히 소중하게 지켜야 할 것이 없다는 점을 기억하기 바란다. 천국과 지옥, 사랑과 희망, 영적 추구와 깨달음, 삶의 의미나 우리를 지켜주는 다양한 신들도 마찬가지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 모두가 당신의 이원적 인식의 구조 안에서 만들어진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직조한 그물의 눈금이고 상상으로 창조한 의식의 산물이다. 스스로 만든 그물에 스스로 걸려있는 셈이다. 머릿속으로 아무리 아름다운 유니콘을 만들어도, 그것은 신성한 것도 아니고 고귀한 것도 아니다. 그저 0이거나 1, 둘 중 하나일 뿐.


이런 말이 너무 건조하고 차갑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뒤따르는 진실은 다행스럽게도 그렇게 매정하지는 않다. 단지 오해와 상상을 걷어내는 과정에서 명확함이 필요할 뿐이다.


0과 1이 스스로 만들어낸 환상 같은 개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진실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세상에는 1이란 것이 없지만 0의 개념을 만들어내면서 1인 것처럼 드러나고, 반대로 세상엔 0이란 것이 없지만 1을 만들어내면서 0인 듯 보인다는 것, 이것을 볼 수 있다면 이야기는 정말 쉽게 풀린다. 쉽게 구조적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 0이 0이 아니고 1이 1이 아니라는 것, 당신이 당신이 아니고 내가 내가 아니라는 것, 그 모든 개념이 의지하고 있는 것이 결국 구름 같은 또 다른 개념일 뿐이라는 사실을 바로 봄으로써 마무리된다.


우리가 에덴동산에서 따먹은 ‘선악과’는 결국 ‘영일과(0과 1의 과일)’다. 영일과는 사실 비극적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일과를 토해내거나 그것을 먹지 않았던 과거로 시간을 되돌리려 노력할 필요는 없다. 이원적인 생각을 잠재우거나 고요를 추구하거나 아무 일 없는 마음의 평화를 추구하는 일련의 노력은 핵심에서 벗어나 있다.



다시,

이원에서 비이원으로


깨달음은 어릴 적 순수의 시대로 돌아가거나 온갖 긍정적인 미사여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지금까지 진행된 의식의 이성적 기능을 포함하고 넘어서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과 우리 자신에 대해서 제대로 눈을 뜨고, 스스로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자유로워지는 바른 방향이다. (그물에 걸리는 모든 것은 아무것도 소중한 것이 없다. 일단은 그렇다.)


혹시라도 자유의 길을 선택했다면, 이것만은 잊지 말고 챙겨 가자.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의 루트는 여기서 절대 벗어나지 않는다.)


비이원(전이성) > 이원(이성) > 이 둘을 포함한 비이원의 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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