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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으로 세상을 본다는 의미

#깨달음 #연기법 #개념 #생각

by 나말록 Mar 11. 2025

"원을 그리면... 원의 안과 밖을 다르다고 생각한다."

"원 그림을 공(환)이라고 보면, 안과 밖은 생각이 구분한 가상이다."


이원적인 관점으로 이런 말을 이해하려면 이런 의문이 들지도 모르겠다.


“원은 내가 그린 것이 아니라, 이미 눈앞에 존재하는 것 아닌가? 생각을 하건 하지 않건 이미 그렇게 있는 것 아닌가? 왜 그것을 ‘생각이 구분한 가상’이라고 하는 걸까?"


눈앞의 대상 경계는 원인과 조건으로 말미암아 연기로 드러나 있다. 대상 경계의 모양을 따라서 관념을 세우고, 나라고, 너라고, 사과라고 포도라고 이름 짓고 그런 것이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모양을 따라서 개념을 세우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것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느껴진다. 사과의 모양을 보고 사과라는 개념을 세우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다. 당연히 그래야만 할 것 같고, 더구나 그것은 유용하기까지 하다.


현상과 개념이 어우러지며 어떻게 실체관념을 만들어내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개념의 특징을 좀 자세히 살펴보자. 개념으로 세상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세밀하게 따져 보자는 것이다.


관념, 개념, 생각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생각의 기본 단위인 개념, 그중에서도 '대상에 대한 개념'을 기준으로 살펴보자.


개념은 크게 3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고정성'이고 , 둘째는 '분절성' 그리고 마지막은 '유용성'


각각은 아래와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다.


- 고정성 : '사과'라는 개념은 늙거나 죽지 않는다.

- 분절성 : '사과'라는 개념은 '사과 아닌 것'이라는 분리를 만들어 낸다.

- 유용성 : '사과'라는 개념은 유용하다.


각 특징들을 각각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 고정


눈앞에 사과의 모양을 인식한다. '사과'라는 개념으로 동일시하고 있다. 사과를 반으로 쪼개 보면, 이제 기존의 '사과'의 모양은 이미 해체됐다. 그러나 '사과'라는 개념은 쪼개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그것을 '사과'라고 생각한다. 이번에는 '쪼개진'이라는 개념을 더해 '쪼개진 사과'라는 개념을 새롭게 세운다.


#### 분절


'사과'라는 개념을 세우는 순간, '사과 아님'이라는 상대적인 대극이 만들어진다. 이원적인 관점에서는 이 대극을 다른 것 혹은 분리된 것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이렇게 대극이 동시에 생기는 것은 현현하고 인식되기 위한 기본 구조다. 그래서 무엇이든 드러나는 것은 대극을 필요로 한다. 마치 판화의 양각이 드러나는 순간 음각이 동시에 드러나는 것과 같다. 음각과 양각의 깊이 가 같으면(평면) 모양은 드러나지 않는다. 양각과 음각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단일한 현상에 불과하지만 이원적 관점으로는 다른 것으로 인식한다. 이것 역시 연기법이다.


#### 유용


'사과'라는 개념 덕분에 사과를 먹고 마시고 소통하고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유용함은 실상과는 관련이 없지만, 유용하기 때문에 진실이라는 착각을 만들어낸다. 때로는 환상이라고 해도 나에게 유용하다면 다시 실체관념에 빠지는 것처럼, 유용함은 실체관념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대상 경계와 개념의 조합이 아무리 유용하다고 해도 그것은 마치 꿈속에서의 유용함과 같다. 꿈속에서 아무리 유용하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꿈속의 일이다.


이러한 개념의 속성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데 그대로 반영된다. 순서적으로 보면 대상경계보다 개념이 나중에 세워졌으니, 생각(개념)의 틀로 세상을 해석하고 이해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사과가 고정적으로 있는 것 같고, 다른 것들과 분리되어 있는 것 같고, 유용한 것처럼 느끼게 된다. 개념의 특성 그대로 세상을 해석하는 데 사용된다. 그래서 이 생각의 틀 안에서는 모든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보고 분리된 것으로 보고 유용한 것으로 보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면 이제 위의 법문에서 '원' 대신 '사과'로 바꿔서 다시 살펴보자.


"사과의 모양이 드러나면... 사과의 안과 밖을 다르다고 생각한다."

"사과라는 경계를 공(환)이라고 보면, 안과 밖은 생각이 구분한 가상이다."


<사과의 모양이 드러나면, 사과의 안과 밖을 다르다고 생각한다.>


사과의 모양이 드러나면 '사과'라는 개념이 모양에 붙고 '사과(안)'와 '사과 아닌 것(밖)'의 구분이 생기고 그것을 다르다고 생각한다.


<사과라는 경계를 공(환)이라고 보면...>


사과를 연기적 관점으로 보면, 사과는 사과 아닌 모든 것들로 인해 드러나, 사과라고 할 것이 따로 없음을 보면…


<안과 밖은 생각이 구분한 가상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말은 '생각이 구분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원래 그런 것이 아니라 나의 생각이 그렇게 구분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상이라고 표현한다. 가상이란 사실이 아닌 것을 마치 사실처럼 지어낸 것이라는 말이다.


사실 사과라고 할 것이 없다는 것을 확연하게 본다면 사과의 모양을 이루는 경계는 더 이상 힘을 잃는다. 그야말로 허공에 열심히 그려놓은 동그라미와 다를 바가 없다. 아무리 대상의 경계가 뚜렷이 보이더라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대상에 대한 것이지만 생각도 마찬가지다. 경계라고 할 것은 없지만 눈에 보이는 모양을 따라 개념을 세운 것이 바로 가상, 즉 '사실이 아닌 것을 마치 사실처럼 지어내고' 스스로 믿었다는 말이다. 이것은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직설적인 표현이다. 그 모든 경계를 만든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당신이라는 말이다.


물론 그렇게 경계를 그은 이유는 있다. 앞 서 말한 '유용성' 때문이다. 예를 들어 컵의 개념적인 경계를 이렇게 절반만 그었다고 하면, 이런 개념은 별로 쓸 모가 없다. 컵의 모양에 따라 개념을 세워야만 쓸모가 생긴다. 그러나 A로 개념을 세우건, B로 개념을 세우건 아무 차이가 없다. 둘 다 가상이기 때문이다. A라는 개념이 대접을 받는 건 어디까지나 유용함 때문이지 진실이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꿈속의 유용함인 것이다.


아무리 유용하고 예측이 가능한 법칙이 작용한다고 해도 경계에 당위성은 있는 것은 아니다. 쉽게 말해서, 너 왜 이렇게 절반만 개념으로 세웠어? 컵은 이렇게 덩어리로 움직이는데?라고 심판할 수 없다는 말이다. 개념을 이렇게 세우 건 저렇게 세우건, 쓸모가 있건 없건, 실상 관점에서는 아무 차이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경계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실상과 대상경계, 그리고 그 위에 씌우는 개념과의 관계다.


역시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상의 경계나 개념의 경계나 모두 그것 아닌 원인.조건으로 말미암은 공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연기법의 핵심이다. 아무리 유용하더라도 실상은 공이고, 실상의 관점에서는 모양을 따라 개념을 세우는 것과 모양과 상관없이 개념으로 세우는 것은 차별이 없다.


어떤가? 아직도 안이라는 개념과 밖이라는 개념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 같은가?


연기사유를 해보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연기법을 공부할 때 원인.조건들이 '모여서' '함께 해서' '꽉 차있다'...라는 표현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사과의 안쪽에만 원인.조건이 꽉 찬 상상을 할 수도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원인과 조건은 사과 안뿐만 아니라 사과 모양 밖에도 있다. 지금 당장 중력이나 공간이나 기압이 없으면 사과의 모양은 지금 이렇게 드러나지 못한다. 그것들 덕분에, 그것에 의지하여, 그것으로 말미암아 사과의 모양이 드러났으니, 그 모든 원인.조건들이 사과의 안과 밖으로 꽉 차 있는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사과의 모양을 만들고 지탱하고 있으니 그 원인.조건은 내부에만 있는 게 아니다. 단지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을 뿐.


공간 역시 우리가 실체시하는 대상 중 하나다. 사과처럼 인식되지는 않지만 공간 역시 공간 아닌 모든 것들에 의해 연기적으로 드러난 일종의 모양이다. 그렇다고 굳이 공간을 따로 연기사유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사과라고 할 그 무엇도 없다는 것은 그 자체로 모든 경계를 허물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이고 만져지기 때문에 실체관념이 금세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연기법 공부를 꾸준히 따라가다 보면 이원적인 관점에서 존재의 증거로 사용되던 이런 감각들은 그대로 환의 증거로 바뀌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보이기 때문에 연기인 것이고, 만질 수 있기 때문에 연기인 것이고 먹을 수 있으니까 연기라는 이해가 생기고, 그 이해를 넘어 그렇게 보이고 알게 된다.


이쯤 되면 그동안 평평한 도화지 위에 자기의 생각(관념)을 덧씌워 왔다는 것도 선명하게 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관념 또한 현현한 모든 것을 원인.조건으로 해서 드러났으므로, 그 생각의 모양 또한 사과의 모양과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아, 생각이나 의식이나 사과나 책상이나 그것을 지금껏 주관으로 경험한다고 착각했던 '나'라는 것까지 모두 한바탕이 되는 것으로 공부가 진행된다.


이렇게 우리는 단지 사과 한 알을 주제로 연기사유를 시작하지만, 사과 한 알에는 온 우주의 모든 것이 한치의 틈도 없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으며, 동시에 아무것도 들어차 있지 않은 공한 본성이 자각으로 드러난다. 그렇게 안이라고 할 것도 밖이라고 할 것도, 사과라고 할 것도 없는, 공하고 충만한 실상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연기법은 이렇게 실상을 바로 보아, 안과 밖이라는 경계를 포함, 일체의 망념을 날려버리는 요술지팡이와 다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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